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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의 기록 16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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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대와 대치하던 계엄군이 오후 1시 무렵 시민들을 향해 집단발포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함. 유혈진압이 격화되자 시민들의 무장 저항이 본격화되었으며, 계엄군은 이후 시내 중심부에서 철수하여 광주 외곽을 봉쇄함.

이 발포는 5·18민주화운동의 전개를 바꾼 핵심 사건이자 오랜 진상규명의 대상이었음. 전두환의 신군부 지도자로서의 내란 책임과 별개로, 이날 도청 앞 집단발포의 구체적 명령 경로와 최종 명령자를 특정하는 문제는 2024년 조사위 종합보고서 발표 당시에도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쟁점으로 남음.

전두환

1980년 5월 21일 녹두서점에 모인 윤상원·정상용·이양현·정현애·김상집 등이 계엄군의 진압과 광주의 참상을 알릴 소식지 발간에 뜻을 모으고, 윤상원이 이끄는 들불야학팀이 제작을 전담하기로 결정. 윤상원이 들불야학 교사 전용호에게 결정을 전달한 뒤 교사와 학생 10여 명을 모아 『투사회보』 제작 착수.

들불야학 구성원들은 원고 작성과 편집, 등사, 배포 작업을 나누어 수행했으며, 박용준은 철야 등사 작업에 참여. 제작진은 단속을 피해 광천동 일대의 빈집과 들불야학 주변을 옮겨 다니며 소식지를 발행하고 시민들에게 배포. 5월 25일 제9호부터 제호를 『민주시민회보』로 변경한 뒤 5월 26일까지 제작을 이어가며, 언론 통제 속에서 항쟁의 상황과 시민들의 요구를 전달한 주요 대안 정보 통로 역할.

투사회보

스튜디오 투자 대신 '스타워즈' 수익과 대출로 제작비를 조달해 판권과 상품화 권리를 회사가 직접 보유하는 방식으로 속편 완성. 어빈 커슈너가 연출을 맡았고 서사의 어두운 전환과 결말의 반전으로 시리즈의 폭 확장. 창작자가 배급사에 종속되지 않고 프랜차이즈를 소유하는 사업 모델의 초기 사례.

조지 루카스 창작자·제작총괄

스탠리 큐브릭이 스티븐 킹의 소설을 각색한 《샤이닝》의 로스앤젤레스·뉴욕 개봉. 잭 니콜슨이 겨울 동안 외딴 오버룩 호텔을 관리하며 집필하려는 잭 토런스 역.

셸리 듀발과 대니 로이드가 잭의 아내 웬디와 아들 대니로 출연. 눈에 갇힌 가족의 고립과 잭의 폭력적인 변화를 중심으로, 초자연적 공포와 가족 안의 위협을 결합한 작품. 니콜슨의 과장된 표정과 몸짓이 극단으로 치닫는 공포 연기의 대표적 배역.

1980년 5월 25일 조선일보에 광주 르포를 게재하며 광주를 ‘무정부 상태’로, 바리케이드 뒤의 무장 시민을 ‘총을 든 난동자’로 표현함. 계엄군의 집단 발포와 시민 희생이 이어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맥락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당시 조선일보 보도의 문제를 보여주는 사례로 거론됨. 김대중은 1997년 회고에서 “기사는, 신문은 그 시대 그 상황의 산물이며 기록일 수밖에 없다”고 썼고, 다른 글에서는 해당 기사를 쓰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를 밝힌 것으로 전해짐.

김대중 (언론인)

1980년 5월 25일 민주시민학생투쟁위원회 결성과 항쟁 지도부 재편 과정에서 소식지 제작 거점을 광주YWCA로 이전하고, 제호를 『투사회보』에서 『민주시민회보』로 변경. 새 제호로 발행한 첫 소식지는 앞선 『투사회보』 제8호의 호수를 이어받은 제9호로 제작.

제호 변경 뒤에도 들불야학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한 제작 체계와 소식지의 기능은 계속 유지. 『민주시민회보』는 항쟁 지도부의 입장과 광주의 상황을 시민들에게 전달하며 5월 26일까지 발행.

투사회보

계엄군이 상무충정작전을 실행하여 전남도청과 광주 시내의 시민군 거점을 다시 점령함. 공수여단 특공조와 정규군 병력이 투입된 새벽 진압 과정에서 윤상원 등을 비롯한 시민들이 사망하고 다수가 연행되면서 열흘간의 항쟁이 무력으로 종결됨.

대법원은 전두환 등이 저항 세력의 사망을 예상하면서도 재진입작전을 결정·강행한 데 대해 내란목적살인의 공동책임을 인정함. 작전 명령에 작전 수행 범위의 발포를 허용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판단으로, 이는 5월 21일 집단발포의 구체적인 최초 명령자가 누구였는지를 확정한 판단과는 구별됨.

전두환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최후 진압 작전으로 광주YWCA 건물을 공격하면서, 건물 안에서 마지막 소식지를 제작하던 박용준이 총격으로 사망. 계엄군은 제작 중이던 『민주시민회보』 제10호를 압수했으며, 이에 따라 5월 21일 『투사회보』로 시작된 항쟁 소식지 발행도 종료.

언론 통제 속에서 광주의 상황과 항쟁 지도부의 입장을 시민들에게 전달하던 대안 언론 활동이 계엄군의 무력 진압과 함께 중단.

투사회보

5·18 광주 민주화운동 현장을 목격하고 서울로 올라온 광주 남동성당 김성용 신부의 증언과 〈어느 목격자의 증언〉 문건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임에서 약 40명의 사제에게 전달됨. 언론 통제와 계엄당국의 발표로 광주의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웠던 가운데 천주교 인적망을 통해 계엄군의 폭력과 시민 피해 상황이 확산되기 시작함.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도 이후 작성한 문건에서 5월 30일 사제단 모임을 통해 해당 증언이 전파됐다고 기록함. 사제단과 광주대교구 사제들은 뒤이어 관련 증언과 성명서를 국내외에 알리며 5·18 진상규명 활동에 참여함.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비상계엄 아래 대통령의 자문·보좌기구를 표방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설치됨. 최규하 대통령이 위원장을, 전두환이 실무 권한을 집중한 상임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으며, 군 인사와 대통령 비서진이 참여한 상임위원회 및 분과위원회가 국정 전반에 관여함.

국보위는 공직자 숙정, 언론 통제와 사회정화 조치 등을 추진하며 신군부의 국정 장악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함. 형식적인 대통령 자문기구와 실제 권력 행사의 차이가 컸으며, 법원은 전두환 등이 국보위를 통해 행정부와 대통령의 기능을 무력화한 사실을 인정함.

전두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