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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Syngman Rheeen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대한제국기 개화·민권운동에 참여하고 미국과 하와이에서 교육·출판·독립 외교를 전개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와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1925년 임시의정원의 탄핵으로 면직됨.

해방 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해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재임 중 농지개혁과 한미동맹 형성이 이루어짐.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하고 강압적 개헌과 야당 탄압으로 장기집권을 추진했으며, 군·경이 제주4·3 진압과 전쟁기 보도연맹원·예비검속자 처형 과정에서 민간인을 대규모로 살해한 데 대한 통치 책임도 지고 있음. 3·15 부정선거와 경찰의 유혈진압에 맞선 4·19혁명으로 1960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남.

47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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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추가 정보

독립운동과 외교 노선

대한제국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개화·민권운동에 참여했으며, 투옥 중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독립정신》을 집필함. 출옥 후 미국에서 학업과 외교활동을 이어갔고, 하와이에서는 한인 교육과 출판, 교민조직을 독립운동의 기반으로 삼았음. 미국 정부와 국제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외교독립 노선을 중시했으나, 열강의 한국 독립 보장과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얻지는 못했음.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와 통합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됨. 같은 해 정한경과 함께 장래의 독립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요청한 일은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한 동료들의 비판을 받았음. 장기간의 미국 체류, 구미위원부의 운영과 미주 재정 처리, 임시정부의 권한을 둘러싼 갈등이 누적되어 1925년 임시의정원에서 탄핵·면직됨. 이후에도 독립 외교를 계속했고, 1941년에는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장을 맡았음.

분단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해방 후 미·소의 분할 점령, 신탁통치를 둘러싼 대립,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속에서 통일정부 수립은 난관에 부딪힘. 이승만은 1946년 정읍 발언을 통해 남한에 먼저 정부를 세우는 노선을 공개적으로 제시했으며, 김구·김규식 등의 남북협상 노선과 갈라섰음. 분단은 국제정세와 남북 정치세력의 선택이 겹친 결과였고, 이승만의 단독정부 추진 역시 그 과정에 영향을 미친 정치적 선택이었음.

1948년 5·10 총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 제헌국회 의장을 맡았으며, 헌법 제정 과정에서 대통령제를 주장함. 7월 20일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됨. 헌법과 의회에 기반한 공화국의 출범이었으나, 남북에 별도 정부가 들어서면서 통일정부 수립은 실현되지 못했음.

농지개혁과 사회경제 변화

이승만 정부는 농지개혁법을 제정·시행하여 지주의 농지를 유상으로 매수하고 농민에게 유상으로 분배함. 농지개혁은 지주·소작 관계를 크게 약화시키고 자작농 중심의 토지 소유를 확대했음. 해방 이후 농민의 토지 요구, 북한의 토지개혁과 미군정의 귀속농지 분배가 선행했으며, 조봉암 등 농림부 인사와 국회도 법안 형성과 시행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 전쟁과 상환 부담, 영세한 농가 규모로 농민 생활의 불안정은 계속되었음.

전쟁과 한미동맹

1950년 북한의 전면 남침 이후 이승만 정부는 미국과 유엔군의 지원 아래 전쟁을 수행함.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했으며, 전쟁의 파괴와 피란 속에서 국가의 존속과 국민 보호라는 과제에 직면했음. 이승만은 분단을 남기는 정전에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주장했으며, 1953년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해 유엔군사령부와 충돌함.

정전 전후의 교섭에서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장기적인 안보 보장과 원조를 요구했고, 미국은 한국의 독자적인 북진으로 전쟁이 재개되는 것을 막으려 했음.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후속 합의는 이러한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였으며, 전후 안보와 미군 주둔의 제도적 토대가 됨. 조약은 공동 위험에 각국의 헌법상 절차에 따라 대응하도록 규정함.

권위주의 통치와 정치탄압

반공주의는 대외 안보 노선뿐 아니라 국내 반대세력을 배제하는 명분으로도 사용됨. 이승만은 친일행위를 조사한 반민특위의 활동에 반대하고 특별경찰대 해산을 지시했으며, 경찰의 1949년 6·6 습격 이후 친일 청산은 크게 후퇴함. 1952년에는 계엄과 의원 체포로 국회를 압박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관철했고, 1954년에는 자유당이 사사오입 논리로 부결 결과를 뒤집어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없앰.

정치적 경쟁자 조봉암과 진보당에 대한 탄압은 정당 활동과 평화통일론을 제약함. 조봉암은 1959년 처형되었으나, 사형의 핵심 근거가 된 간첩 혐의와 진보당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 부분은 2011년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로 판단됨.

국가폭력과 대통령의 책임

제주4·3은 미군정기 경찰 발포와 탄압, 1948년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를 거쳐 확대됨.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승만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경 진압 방침을 지시했으며, 군·경은 마을을 소각하고 주민들을 재판 없이 살해함. 정부의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진압 지휘관들의 책임과 함께 이승만에게 최종 책임이 있다고 판단함.

한국전쟁 초기에는 군·경이 국민보도연맹원과 좌익 혐의자로 분류된 주민들을 예비검속한 뒤 여러 지역에서 집단살해함. 희생자에는 좌익 활동과 무관하게 보도연맹에 가입된 주민들도 포함됨. 진실화해위원회는 울산 사건 등에서 국가기관의 불법 처형을 확인하고, 현장 집행과 군 지휘체계, 대통령의 최종 책임을 구분하여 규명함. 이러한 조사 결과는 국가의 조직적 가해와 통치 책임을 드러내며, 지역별 명령 경로와 개별 행위에 대한 판단은 각각의 조사에 근거함.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행정·경찰 조직과 자유당이 사전투표, 공개투표, 야당 참관 방해 등 대규모 부정을 저지름. 마산의 항의 시위와 경찰 발포, 김주열의 시신 발견에 이어 학생·시민의 저항이 전국으로 확대됨. 4월 19일 경찰의 유혈진압과 정부의 계엄 선포 뒤에도 퇴진 요구가 계속되었고, 대학교수단도 시위에 참여함.

이승만은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이튿날 사임서를 국회에 보냄. 그의 퇴진은 부정선거와 국가폭력에 맞선 시민들의 지속적인 저항이 가져온 결과였음. 같은 해 5월 하와이로 떠났으며, 생전에 귀국하지 못하고 1965년 현지에서 사망함.

타임라인 47건 · 1875–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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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nt 43건

독립협회 회원과 한성 시민이 종로에서 첫 만민공동회를 열고 러시아의 군사·재정 간섭에 반대한 사건. 상인과 학생 등 여러 계층이 참여하여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 자주독립과 국권 수호를 요구한 대중 집회. 배재학당 학생 이승만도 군사권과 재정권을 러시아에 넘기는 데 반대하는 연설에 참여한 활동.

토론과 신문 논설로 전개되던 개혁 요구가 대규모 공개 정치집회로 확대되는 계기. 배재학당과 협성회에서 신학문과 토론을 경험한 이승만에게도 대중을 상대로 정치적 주장을 펼치는 무대. 같은 해 이어진 그의 독립협회·언론 활동 및 11월 독립협회 지도자 체포에 항의하는 운동과 연결되는 경험.

이승만이 박영효 계열의 고종 폐위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됨. 이후 1904년 8월까지 한성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했음.

1899년 1월 9일, 이승만이 박영효 계열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됨.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개혁운동이 탄압받던 시기의 일이었음. 같은 달 탈옥을 시도했으나 다시 붙잡혔고, 이후 종신형을 선고받음.

수감 기간에 그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독서와 번역, 집필을 계속했음. 옥중에서 학교와 도서실을 운영했으며, 《제국신문》에 논설을 보냄.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에는 국민 계몽과 국가의 독립을 논한 《독립정신》을 집필했음. 이 책은 출옥 뒤인 1910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처음 출판됨. 이승만은 1904년 8월 9일 석방되어 약 5년 7개월의 수감 생활을 마쳤음.

석방된 이승만이 미국 유학과 대한제국의 독립 보전을 위한 외교활동을 위해 서울을 떠남.

1904년 11월 4일, 이승만이 미국으로 가기 위해 서울을 출발했음.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이 번역한 영문일기는 이날 오후 서울에서 출발하는 기록으로 시작함. 그는 같은 해 8월 한성감옥에서 풀려난 뒤, 민영환과 한규설 등의 도움을 받아 미국에 한국의 독립 보전을 호소할 길을 찾았음.

그의 미국행은 유학과 외교활동이 함께 진행되는 출발점이었음. 1905년 조지워싱턴대학교에 입학한 뒤 미국 정부 관계자들에게 한국 문제를 알렸고, 같은 해 8월에는 윤병구와 함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독립 보전을 요청했음. 그러나 미국의 대일 정책을 바꾸거나 한국의 주권을 보호할 구체적 성과를 얻지는 못했음.

이승만이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미국에서 이어 온 학업을 통해 국제법과 외교사를 연구했음.

1910년 6월 14일, 이승만이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프린스턴 대학기록실이 공개한 학적카드에는 학위 수여일이 이날로 적혀 있음. 그는 조지워싱턴대학교 학부를 마친 뒤 하버드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1908년 가을 프린스턴에 입학했음.

그의 박사논문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었음. 국제법과 외교사를 공부한 학업은 이후 미국 정부와 국제회의를 상대로 펼친 독립 외교의 지적 배경이 됨. 논문 출판은 학위 취득과 별개로 진행되어 1912년에 이루어짐. 프린스턴 기록실은 당시 이승만이 출판 비용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음을 관련 서신으로 설명함.

이승만이 운영하던 하와이의 교육사업이 남녀공학 한인기독학원으로 확대됨. 한인 자녀의 한국어 교육과 민족교육을 위한 기반이었음.

1918년 9월, 하와이 호놀룰루의 한인 교육기관이 한인기독학원이라는 이름으로 개편됨. 이승만이 1914년 여학생 기숙사를 마련하고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사업이 그 토대였음. 대한인국민회의 지원과 교민사회의 자원을 바탕으로 학교 부지와 교사가 마련되었고, 남녀가 함께 배우는 민족교육기관으로 발전했음.

이승만은 1913년부터 하와이에서 한인 교육과 종교 활동에 힘을 기울였음. 학교와 교회, 한글 간행물은 이민사회에서 언어와 공동체 의식을 유지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기반이 됨. 다만 학원 운영은 재정난을 동반했음. 1923년 학생 고국방문단을 보내 모금하는 과정에서는 일본 영사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문제 때문에 독립운동 원칙과의 충돌을 지적하는 교민사회의 반대도 일어남.

이승만과 정한경이 장래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어 달라는 청원서를 보냄.

1919년 2월 25일, 이승만과 정한경이 대한인국민회 대표 명의로 파리강화회의에 청원서를 작성했음.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에게도 같은 취지의 서한을 보냄. 파리행 여권을 얻지 못한 두 사람은 서면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가 부당하다고 호소하고, 장래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 아래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제안했음.

청원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국제적 보장을 거쳐 독립에 이르겠다는 단계적 외교방안이었음. 그러나 즉각적이고 완전한 독립을 지향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다른 외부 통치를 스스로 요청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강한 비판을 불렀음. 이승만이 임시정부 지도자로 선출된 뒤에도 위임통치 청원 문제는 그의 지도력과 외교노선을 둘러싼 갈등의 중요한 쟁점으로 남았음.

문서가 작성된 때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전이었음. 청원은 뒤에 세워진 임시정부 명의가 아니라 대한인국민회 대표 명의로 이루어짐. 청원의 내용과 작성 사실은 원문으로 확인되지만, 그것이 현실적인 차선책이었는지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훼손한 선택이었는지는 평가가 갈림.

이승만이 집정관총재 명의의 공포문으로 구미위원부를 설치했음. 구미 각국을 상대로 독립 외교와 선전, 자금 모집을 수행하기 위한 기관이었음.

1919년 8월 25일, 이승만은 집정관총재 공포문 제2호에 따라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했음.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라는 지위에 근거한 조치였으며, 파리에서 독립 외교를 펼친 김규식이 위원장을 맡음. 이 조직은 한국의 독립과 임시정부의 존재를 미국과 유럽에 알리는 외교 창구로 활동했음.

구미위원부는 미국 정부와 의회에 청원하고, 간행물과 강연을 통해 일본의 식민통치를 비판했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음. 미국의 여론과 정책에 영향을 미쳐 한국 문제를 국제정치의 의제로 만들려는 이승만의 외교독립 노선이 조직 형태를 갖춘 것임.

한편 구미위원부의 설치 절차와 운영, 미주에서 모인 재정의 처리 문제는 상하이 임시정부와 갈등을 일으켰음. 1925년 이승만 면직 뒤 임시정부는 폐지를 결정했으나 이승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활동을 계속했음. 이후 1941년 설치된 주미외교위원부는 임시정부가 공포한 별도 규정에 근거한 기관이었음.

임시의정원이 대통령제를 채택하는 헌법 개정안을 의결하고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음. 새 헌법과 정부 명단은 9월 11일 공포됨.

1919년 9월 6일, 상하이 임시의정원이 정부 통합을 위한 헌법 개정안을 의결하고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음. 이는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국내에서 선포된 한성정부 계통을 하나로 묶으려는 협상의 결과였음. 국무총리 중심의 초기 조직은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두는 체제로 바뀜.

9월 11일에는 개정된 대한민국 임시헌법과 새 국무원의 명단이 공포됨. 임시대통령은 이승만, 국무총리는 이동휘였고, 안창호 등 여러 지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통합 정부에 참여했음. 다만 정부가 통합되었다고 해서 독립운동 방략과 지도체제에 관한 이견까지 해소된 것은 아니었음.

이승만은 미국에서 외교활동을 계속하다가 1920년 12월 상하이에 왔음. 약 반년의 체류 동안 임시정부의 재정과 권한, 대외활동 방향을 놓고 다른 지도자들과 충돌했음. 선출일인 9월 6일, 헌법 공포일인 9월 11일, 실제 상하이 부임은 서로 다른 시점임.

이승만이 호놀룰루에서 대한인동지회 결성을 주도했음. 동지회는 임시정부 옹호와 교민 단결을 표방하며 그의 외교활동을 뒷받침했음.

1921년 7월, 이승만이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대한인동지회 조직을 주도했음.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지도체제와 독립운동 방략을 둘러싼 갈등을 겪고 하와이로 돌아온 직후였음. 단체는 임시정부를 옹호하고 교민의 단결을 도모한다는 목적을 내세웠으며, 이승만을 지지하는 인사들을 결집시켰음.

동지회는 《태평양잡지》를 활동의 매개로 삼고, 1924년 하와이 한인대표회를 계기로 조직과 정강을 정비했음. 정치적 독립운동 지원과 함께 교민의 경제적 역량을 키우려 했으며, 동지식산회사 운영과 동지촌 건설도 추진했음. 그러나 자본 부족과 경영난 속에 회사가 파산하면서 경제적 자립 구상은 좌절됨.

동지회는 이후에도 이승만의 중요한 정치적 후원조직으로 남았음. 동시에 다른 한인 단체들과 대표권과 재정, 외교활동의 주도권을 놓고 갈등을 겪었음. 하와이 활동은 교육과 독립운동의 기반을 넓히는 과정이면서, 교민사회의 분열과 지도권 경쟁이 함께 나타난 과정이었음.

이승만이 이끄는 한국대표단이 워싱턴회의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를 다루어 달라는 호소문을 작성함.

1921년 12월 1일자로 작성된 한국대표단의 호소문은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를 다루어 달라고 요청함. 문서는 한국에 대한 불의가 해결되지 않으면 동아시아의 평화도 보장되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회의에서 한국인의 진술을 들을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음. 이승만과 서재필, 정한경, 미국인 고문 프레드 돌프와 찰스 토머스의 이름이 문서에 실려 있음.

호소문은 미국을 비롯한 열강이 과거 한국과 맺은 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을 중요한 근거로 제시했음. 이를 통해 일본의 한국 지배를 단순한 일본 국내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 약속과 동아시아 질서의 문제로 다루려 했음. 문서는 미국 상원의 공식 인쇄물로도 남아 있음.

그러나 이러한 청원과 선전에도 불구하고 한국대표단은 회의의 정식 참가국 대표로 인정받지 못했고, 한국 독립 문제를 정식 의제로 올리는 데에도 실패했음. 워싱턴회의 외교는 국제 여론에 한국 문제를 알린 시도인 동시에, 승전국과 강대국 중심 국제회의에 기대었던 독립 외교의 한계를 드러낸 사건이었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탄핵 심판서를 가결하여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직에서 면직했음.

1925년 3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직에서 면직한다는 탄핵 심판서를 통과시켰음. 장기간 미국에 머문 대통령과 상하이 임시정부 사이의 권한·재정 갈등, 독립운동 방략에 관한 대립이 누적된 결과였음.

탄핵안은 미주 교민의 인구세 처리와 정부 재정 수입 방해, 미주 지역 정무를 임시정부에서 분리하려 한 행동, 임시헌법과 임시의정원의 권한을 부정한 점 등을 사유로 제시했음. 심판위원회는 상하이를 떠나 직무를 충분히 수행하지 않은 점과 정부의 행정·재정을 방해한 점도 지적했음. 위임통치 청원을 둘러싼 논란이 갈등의 배경이었다면, 최종 탄핵 심판은 정부 운영과 헌법·의정원 권한을 둘러싼 구체적인 행위들을 문제 삼았음.

탄핵은 대통령의 임기가 명시되지 않았던 임시정부 체제에서 지도부를 교체하기 위한 절차이기도 했음. 이 결정으로 이승만의 임시대통령 재임은 끝남. 이후에도 그는 하와이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며, 임시정부와의 관계는 새로운 외교 직책을 맡는 과정을 거쳐 다시 조정됨.

이승만이 국제연맹 사무총장에게 한국과 만주의 한인 문제를 제기하는 서한을 보내고, 일본의 대륙 침략과 한국 독립의 연관성을 호소했음.

1933년 2월 8일, 제네바에 머물던 이승만은 국제연맹 사무총장 에릭 드러먼드에게 서한을 보냄. 일본의 만주 침략이 국제연맹에서 논의되던 때에, 한국의 식민지화와 만주에 사는 한인들의 처지가 그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했음. 같은 날 미국 국무장관 헨리 스팀슨에게도 한국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요청했음.

그는 1932년 11월 임시정부의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된 뒤 유럽으로 향했음. 제네바에서는 언론인과 외교관을 만나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알렸으며, 리튼보고서를 검토하여 《만주의 한국인들》(The Koreans in Manchuria)을 펴냈음. 책과 서한에서 만주 한인의 국적·토지·이주 문제를 일본의 팽창정책과 연결하여 설명했음.

이 활동은 국제연맹이 다루던 만주 문제 속에 한국인의 목소리를 포함시키려는 외교적 시도였음. 그의 활동과 별개로 국제연맹은 리튼보고서를 채택하였고 일본은 탈퇴의 길을 택했음. 한국의 독립이나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은 이 과정에서 실현되지 않았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미외교위원부 설치 규정을 공포하고 이승만에게 대미교섭의 전권을 부여했음.

1941년 6월 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하는 규정을 공포하고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임명했음. 임시정부는 신임장을 통해 그에게 미국과 교섭할 전권을 맡겼음. 이승만은 이전부터 사용한 Korean Commission이라는 대외 명칭을 이어갔지만, 이 조직은 1919년 구미위원부와 구분되는 제도적 근거를 갖추었음. 같은 해 그는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출판하여 일본의 팽창정책이 미국과의 충돌로 이어질 위험을 경고했음.

주미외교위원부는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 대일전쟁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여할 자격, 한국광복군에 대한 군사 지원을 확보하려 했음.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뒤에는 재미한인이 일본인과 같은 적성외국인으로 취급되지 않도록 지위를 개선하는 일에도 힘썼음. 이승만은 미국인 후원단체를 활용한 여론 활동과 미국 정부를 향한 청원을 병행했음.

그러나 미국 정부의 임시정부 불승인 방침은 바뀌지 않았음. 주미외교위원부의 활동은 한국 독립의 요구와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리는 데 기여했지만, 독립운동 측이 원한 정부 승인과 공식 참전 지위를 확보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음.

워싱턴에서 대한인자유대회가 개막했음. 이승만은 개회사를 맡았고, 참가자들은 미국에 임시정부 승인과 연합국 일원으로서의 지위 인정을 요구했음.

1942년 2월 27일, 워싱턴에서 대한인자유대회가 열림. 주미외교위원부와 재미한족연합회, 한미협회가 주최한 대회는 3월 1일까지 계속됨.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김호가 회장을 맡고, 주미외교위원장 이승만이 개회사를 했음.

참가자들은 3·1운동의 독립 의지를 재확인하고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했음. 또한 미국 대통령과 의회에 임시정부 승인을 청원하고, 한국이 연합국선언에 참여한 나라들과 함께 활동할 자격을 인정받도록 요구했음. 태평양전쟁 발발로 미국과 일본이 전쟁에 들어간 상황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연합국의 전쟁 수행과 연결하려는 시도였음.

대회는 교민사회의 지지와 미국 인사들의 관심을 모으는 외교·선전 활동의 장이었음. 그러나 대회 결의 자체가 미국 정부의 승인이나 한국의 정식 참전을 뜻한 것은 아니었음. 임시정부의 국제적 지위를 확보하는 문제는 해방 때까지 해결되지 않았음.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카이로 선언의 한국 독립 약속에 대한 감사를 거듭 전한 일. 한국인들의 연합군 협력 의지와 대일전 참여 계획을 설명하고 미국의 지원 및 전략사무국 관계자의 지속적인 협조를 요청한 내용. 선언의 정치적 약속을 실제 군사 협력으로 발전시키려 한 미주 외교 활동.

카이로 선언

이승만이 1945년 10월 16일 김포비행장에 도착했음. 이튿날 기자회견에서 개인 자격의 귀국임을 밝히고 자주독립과 단결을 호소했음.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이 김포비행장에 도착했음. 1912년 미국으로 떠난 뒤 33년 만의 귀국이었음. 일본의 패전과 해방으로 독립운동의 과제가 국내에서 어떤 국가를 세울 것인가의 문제로 바뀌던 시기에, 오랫동안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한 정치지도자가 국내 정치무대로 들어온 것임.

이튿날인 10월 17일, 이승만은 미군정청에서 존 하지 중장과 아널드 소장의 소개로 기자회견을 했음. 그는 자신이 임시정부 대표나 외교기관 책임자의 지위로 온 것이 아니라 평민의 자격으로 돌아왔다고 밝힘. 국내 사정은 차차 알아가겠다고 말하면서 자주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한 동포들의 협력과 단결을 강조했음.

이 기자회견은 귀국과 동시에 이승만이 어떤 자격과 명분으로 국내 활동을 시작했는지 보여주는 자료임. 장기간의 해외활동에서 국내의 자주독립국가 수립 운동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는 전환점이 됨.

이승만이 전라북도 정읍에서 남북을 포괄하는 정부 구성이 어려워진 상황을 들어,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또는 위원회 등을 조직하자는 구상을 공개적으로 제시함.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중단된 뒤 나온 발언으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 노선이 드러난 중요한 계기였음.

이 발언은 이미 진행 중이던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 신탁통치를 둘러싼 대립, 남북의 정치체제 재편 속에서 나왔음. 이승만은 남한의 정치적 기반을 먼저 마련해 소련의 철수와 통일을 추진한다는 논리를 폈으나, 통일정부 수립을 우선한 세력과의 거리는 커졌음. 분단의 원인을 한 사람의 발언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후 단독선거와 정부 수립을 지지한 그의 선택을 보여 주는 사건임.

1948-05-10 event 제주도 3개 선거구 중 2곳 무효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 실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는 남한 지역에서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됨. 남한에 배정된 200개 의석 가운데 제주 4·3의 영향으로 선거가 무효가 된 북제주 갑·을을 제외하고 198명의 의원이 선출됨. 이승만은 서울 동대문 갑구에서 당선되었고, 5월 31일 열린 국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됨.

소련이 위원단의 북한 입경을 거부하면서 남북 총선거가 실현되지 못하자 유엔소총회는 선거 가능 지역에서의 선거를 권고했음.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이를 지지했지만 김구·김규식 등은 분단 고착을 우려해 남북협상을 추진했고, 좌익세력도 단독선거에 반대했음. 총선거는 대한민국 정부를 구성할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동시에 통일정부를 둘러싼 갈등 속에서 치러졌음.

제헌헌법에 따라 국회가 무기명투표로 초대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함. 대통령 선거에는 재적의원 198명 중 196명이 참여해 이승만이 180표, 김구가 13표, 안재홍이 2표를 얻었고 무효표는 1표였음.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됨.

부통령 선거는 출석 197명 가운데 1차 투표에서 이시영이 113표를 얻었으나 당선에 필요한 득표수에 미달해 다시 투표했으며, 2차 투표에서 133표를 얻어 당선됨. 당시에는 별도 후보자 등록 없이 의원이 이름을 적는 방식이어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불참 의사를 밝힌 김구에게도 표가 나왔음. 선출일은 7월 20일, 정·부통령 취임식은 7월 24일이며 정부 수립 선포는 8월 15일로 구별됨.

대통령 선거 결과는 이승만 180표, 김구 13표, 안재홍 2표, 무효 1표로 총 196표임. 서재필을 적은 1표는 외국 국적 취득을 이유로 무효 처리됨.

부통령 선거 1차 투표는 이시영 113표, 김구 65표, 조만식 10표, 오세창 5표, 장택상 3표, 서상일 1표였음. 2차 투표에서 이시영 133표, 김구 62표, 그 밖의 인물 1표, 무효 1표가 나왔음. 이시영의 133표는 첫 투표 결과가 아니라 당선이 결정된 두 번째 투표의 결과임.

서울 중앙청 앞 광장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의 취임식이 열림. 7월 20일 국회에서 선출된 뒤 열린 취임식으로, 8월 15일의 정부 수립 선포와는 별개의 절차임.

이승만은 취임사에서 대통령으로서의 책임, 정부 조직, 국가 재건과 국제사회와의 관계를 설명했음. 헌법과 국회에 근거한 신생 정부의 출범이라는 의미가 있었으나, 남북을 포괄하는 통일정부가 성립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취임이었음.

이승만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 선포됨. 5·10 총선거, 제헌국회 구성, 7월 17일 헌법 공포, 7월 20일 정·부통령 선출과 내각 구성에 이어 이루어진 정부 출범이었음.

해방 직후의 미·소 분할 점령과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거치며 남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는 방향이 굳어졌음.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한국인의 정부와 헌정체제를 마련한 사건이면서, 9월 9일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분단국가 체제가 성립한 과정의 일부임. 이승만이 추진한 단독정부 수립 노선은 통일정부를 우선했던 독립운동 동료들과의 결별을 수반했음.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이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 봉기는 순천 등으로 확대되었고 정부군의 진압 과정에서 군인·경찰뿐 아니라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됨. 발단인 10월 19일과 이후 수일간 이어진 진압 및 민간인 희생을 구분해 이해할 필요가 있는 사건.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일부 병력이 제주4·3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했음. 지창수 등 남로당 계열 군인들이 주도한 봉기는 여수와 순천 및 전남 동부로 확산되었고, 이 과정에서도 경찰과 우익 인사 등에 대한 살해가 발생했음. 정부수립 약 두 달 만에 발생한 이 사건에 대해 이승만 정부는 군사 진압을 추진했음.

정부는 10월 21일 광주에 토벌 지휘부를 설치하고 22일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음. 정부군이 주요 지역을 다시 장악하는 동안 주민들을 모아 반란 가담자를 가려내는 색출이 진행되었고, 고발이나 지목만으로 법적 절차 없이 처형하는 일이 일어남. 이후 김지회가 지휘를 맡은 반란군 일부는 지리산 등 산악지대로 이동했고, 군·경의 토벌과 주민 희생은 도시 탈환 이후에도 이어짐.

여순사건은 이승만 정부가 군 내부의 좌익 세력을 제거하는 숙군을 확대하고,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는 계기가 됨. 진압 과정의 민간인 집단희생과 유족에 대한 낙인은 장기간 지속됨.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의 해설은 정부군의 진압과 부역자 색출을 국가폭력의 구체적 과정으로 설명함.

제주4·3 진압 과정에서 이승만이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음. 정부수립 이후의 강경 진압과 민간인 집단희생에 대한 대통령의 책임을 보여주는 주요 사건임.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은 대통령령 제31호로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제주 주둔 제9연대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지정했음. 제주4·3은 1947년 3·1절 경찰 발포와 뒤이은 탄압,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의 봉기 등 미군정기의 사건에서 시작됨.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의 발발 과정과, 8월 15일 이후 이승만 정부가 수행한 진압은 시기와 지휘체계를 구분해야 함.

정부수립 후에는 제9연대장 송요찬의 중산간 통행금지 포고, 마을 소개와 소각, 재판 없는 주민 살해가 확대됨. 이승만은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제주와 전남 사건을 철저히 진압하고 가혹한 탄압으로 법의 권위를 세우라는 취지의 강경 방침을 밝힘. 계엄은 1948년 12월 31일 해제되었으나 주민 집단희생은 이후에도 계속됨.

정부의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강경 작전을 수행한 제9연대장과 제2연대장에게 1차 책임을, 계엄 선포와 강경작전 지시를 한 이승만에게 최종 책임을 귀속했음. 이는 대통령의 확인된 정책 지시와 통수 책임에 대한 판단으로, 개별 마을 학살의 현장 명령을 모두 대통령이 직접 내렸다는 뜻과는 구별됨. 보고서는 미군정과 미군사고문단의 책임, 무장대의 민간인 살해도 지적했으며, 전 기간의 인명 피해를 잠정적으로 2만 5천~3만 명으로 추정했음.

무장 경찰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습격해 조사 인력을 체포했음. 이승만은 특경대 해산 지시를 인정했고, 친일행위 조사와 처벌은 급격히 위축됨.

1949년 6월 6일 서울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이끄는 무장 경찰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본부를 습격했음. 전날 경찰 지휘부는 시경국장 김태선을 거쳐 내무차관 장경근에게 특경대 강제 해산 계획을 알리고 허락을 받았음. 경찰은 특위 요원들을 연행하고 특경대의 무장을 해제했으며, 연행된 사람들은 구금 중 가혹행위를 당했음. 국회가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설치한 조사기구가, 수사 대상인 친일 경찰 세력을 포함한 경찰 조직의 공격을 받은 사건이었음.

습격 전부터 이승만은 반민특위가 현직 경찰을 조사·처벌하는 데 반대하며 특경대 해산을 요구했음. 습격 이후에는 경찰의 행동이 자신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밝힘. 국회는 정부 책임을 추궁하고 원상회복을 요구했으나,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소장파 의원들이 체포되고 정부·경찰의 압박이 이어지면서 조사 활동을 지킬 힘은 약해짐.

이후 반민족행위처벌법의 공소시효가 단축되고 위원들이 사퇴하면서 반민특위의 활동은 사실상 마비됨. 6·6 사건은 친일 청산이 좌절되는 결정적 계기이자, 이승만 정부가 반공과 치안 유지를 내세워 식민지 시기 경찰 인력을 보호하고 입법부의 조사 활동을 제약한 사례로 남았음.

농지를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제헌헌법의 원칙을 구체화한 농지개혁법이 법률 제31호로 공포됨. 직접 경작하지 않는 지주의 농지 등을 정부가 사들여 농민에게 분배하는 유상매수·유상분배 방식과 가구당 3정보의 소유 상한을 중심으로 농촌의 토지 소유질서를 바꾸려 한 법률임.

이승만 정부의 주요 사회경제 개혁이었지만, 대통령 한 사람의 구상으로 이루어진 일은 아니었음. 해방 이후 농민의 토지 요구, 북한의 토지개혁, 미군정의 귀속농지 분배가 선행했고, 조봉암이 이끈 농림부와 국회가 법안 형성에 참여했음. 정부·국회·지주층 사이의 보상과 상환 조건을 둘러싼 갈등 때문에 법은 1950년 3월 다시 개정되었으며, 그해 농지 분배가 본격화됨.

농지개혁은 지주·소작 관계를 크게 약화시키고 자작농 중심의 토지 소유체제를 형성한 중요한 변화였음. 다만 개혁 이전의 토지 매각, 전쟁, 농민의 상환 부담과 영세한 경영 규모 때문에 효과와 한계가 함께 나타났으며, 보상·상환·소유권 이전까지 같은 날 완료된 것은 아니었음.

1949년 제정법과 1950년 시행된 개정법의 상환 조건은 구별해야 함. 1950년 개정 후 매수·분배 가격은 평년 생산량의 150%, 상환·보상 기간은 5년을 기준으로 하였음. 법 공포일인 1949년 6월 21일을 농지개혁 전체의 단일 완료일로 이해할 수 없음.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남한을 공격하면서 6·25전쟁이 시작됨. 김일성의 무력통일 구상은 소련의 승인과 지원, 중국과의 협의를 거쳐 실행되었으며, 전쟁은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과 중국군의 개입으로 국제전으로 확대됨.

이승만 정부는 군사적 열세 속에서 미국과 유엔에 지원을 요청했으며, 6월 27일 정부를 대전으로 옮겼음. 이튿날 서울이 북한군에 함락된 뒤에도 정부의 남쪽 이동과 전시체제 전환이 이어졌음. 전쟁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유엔군의 지원을 받아 존속했지만, 대규모 군인·민간인 피해와 피란, 도시·산업시설의 파괴를 겪었음. 적대세력에 의한 폭력뿐 아니라 정부 관할 지역의 불법 민간인 희생도 발생하여, 전쟁 수행과 국민 보호의 책임을 함께 살펴야 하는 시기임.

한국전쟁 발발로 미국이 일본의 경제력과 기지 기능을 동아시아 안보에 더욱 중요하게 보게 된 전환점. 이미 진행 중이던 대일 강화 구상이 일본의 빠른 재건과 서방 진영 편입 문제에 긴밀하게 연결되는 계기. 일본과의 평화 회복과 미국의 군사적 주둔을 함께 설계하는 협상 환경의 형성.

이승만이 북한군의 서울 진입을 앞두고 수도를 떠나 대전에서 대국민 방송을 함. 전쟁 발발 이후 정부·군의 허위 승전 발표가 이어진 가운데 대통령과 정부의 남하는 시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이튿날 한강교 폭파로 피란은 더욱 어려워졌음.

1950년 6월 27일 새벽 이승만은 북한군이 서울로 접근하는 가운데 수도를 떠났으며, 대구를 거쳐 대전에 도착함. 대통령과 정부 지도부가 먼저 남하한 사실은 당일 미국 외교전문에서도 확인됨. 그러나 시민들에게는 지도부의 철수와 서울의 위급한 상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음. 당시 대전방송국 방송과장 유병은은 후일 회고에서 이승만이 대전의 임시 거처에서 특별방송을 준비하도록 하면서 방송 장소 등을 비밀에 부치고 녹음해 반복 방송하도록 지시했다고 증언함.

정부·군이 전달한 정보는 실제 전황과 어긋났음. 6월 26일 국방부는 국군이 적 주력을 격파하고 계속 북상하고 있다고 발표했으나, 실제로는 의정부가 함락되고 서울 방어선이 위협받고 있었음. 27일 오전 무초 주한 미국대사가 작성한 전문에는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 겸 국방장관이 대통령과 각료들의 남하 사실을 전하면서, 자신은 라디오로 국민들에게 집 안에 머물고 전차가 도착하더라도 침착하라고 호소했다고 말한 내용이 남아 있음. 지도부의 피란과 국민에게 전달된 잔류·안심 요구 사이에 뚜렷한 괴리가 있었음.

이승만은 27일 밤 대전에서 라디오 연설을 함. 미국 해외방송정보국(FBIS)의 현존 영문 감청록에는 북한군이 서울 가까이 진격했고 국군의 무기가 부족하다는 설명, 미국의 군사원조 소식, 군과 국민의 분투를 당부하는 내용이 실려 있음. 사람들이 피란처를 찾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는 언급도 있으나, 판독된 부분에는 자신의 피란 사실이나 시민의 구체적인 대피 절차를 알리는 내용이 확인되지 않음. 흔히 알려진 ‘정부가 서울에 남겠다’ 또는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라’는 문구 역시 이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으며, 감청록 말미에는 일부 연설이 판독 불가능했다고 명시되어 있음.

이튿날인 6월 28일 새벽 국군이 한강교를 폭파하고 서울이 북한군에 함락되면서, 제때 떠나지 못한 시민들의 피란은 더욱 어려워졌음. 국민일보가 소개한 1950년 11월 9일 국회 발언에 따르면, 태완선 의원은 서울 수복 뒤 6월 27일의 아침·정오 방송과 국민의 혼란을 거론하며 정부를 비판했음. 이 사건은 대통령의 선행 피란, 정부·군의 전황 오도, 충분한 피란 안내를 받지 못한 시민들의 처지가 함께 드러난 사례로서 이승만 정부의 전쟁 초기 국민 보호 책임과 관련됨.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군·경은 국민보도연맹원과 요시찰인 등을 예비검속한 뒤 여러 지역에서 적법한 절차 없이 살해했음. 국가 조사기구는 이를 국가기관에 의한 불법 민간인 집단희생으로 규명했음.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의 군과 경찰은 국민보도연맹원 및 좌익 혐의자로 분류된 주민들을 연행·구금했음. 국민보도연맹은 정부가 전향자를 지도·관리한다는 명목으로 1949년 조직한 관변단체였으나, 좌익 활동과 무관한 주민도 가입되어 있었음. 전쟁 초기 이 명부와 요시찰인 분류가 예비검속의 근거로 활용됨.

각 지역의 경찰, 육군 정보국 소속 방첩대인 CIC, 헌병대 등은 구금자를 야산과 골짜기, 해상 등으로 이송해 재판 없이 살해했음. 진실화해위원회는 김해에서 1950년 6월 하순부터 9월 중순까지, 부산·사천에서 7~9월에 발생한 희생을 각각 조사했음. 울산 사건에서는 경찰과 울산지구CIC가 구금자들을 집단 총살한 사실을 확인했고, 위법 행위에 대한 확인이나 적법한 처리 절차 없이 이루어진 불법 처형으로 판단했음.

울산 사건 결정에서 진실화해위원회는 직접 총살명령을 울산지구CIC가 내리고 현장 군·경이 집행했으며, 지휘·명령은 상급기관인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하달된 것으로 판단했음. 이어 계엄 지휘체계와 대통령에게 귀속되는 최종 책임을 구분하여 명시했음. 이는 국가의 조직적 가해와 통수 책임을 밝힌 조사 결과이며, 지역별로 규명된 명령 경로와 피해 규모를 전국의 모든 사건에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음.

이승만이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보낸 서한으로,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한국군에 대한 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넘기는 뜻을 전달함. 북한군의 남진과 미군 참전 속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의 지휘체계를 통합하기 위한 조치였음.

이양은 연합작전을 가능하게 했으나 한국 정부와 군의 독자적 군사행동에도 제약을 두었음. 정전 협상기에 이승만이 지휘권 회수를 압박 수단으로 거론하면서 한미 간 갈등의 핵심이 되었고, 전후 한미합의의사록을 통한 작전통제 관계로 이어짐.

국군이 거창군 신원면의 어린이·노인·여성 등을 포함한 주민 수백 명을 집단살해함. 이승만 정부는 현장조사를 방해하고 학살을 군법회의에 따른 적법한 처형으로 설명하는 허위 발표를 내놓았음.

1951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가 경남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민간인들을 집단살해함. 후방의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명분 아래 주민들을 모아 총살했으며, 어린이·노인·여성도 희생됨.

신중목 의원이 3월 29일 국회에서 사건을 폭로하자 합동조사단이 구성되었음. 그러나 신성모 국방장관과 군 관계자들은 현장을 은폐하고 국군을 공비로 위장시켜 총격을 가하게 하는 방법으로 조사를 방해했음. 4월 24일 공보처는 어린이·노인·여성 등을 제외한 남자 187명을 군법회의에서 유죄로 판단하여 개별 처형했다는 허위 공식설명을 발표함. 이는 무고한 민간인의 집단살해를 합법적인 사형집행으로 꾸민 은폐였음.

이승만은 4월 30일 대통령 지시문에서 군인의 다수 생명 희생과 사건의 해외 파장을 인식하면서 관련 지휘관들을 징벌하도록 했음. 그러나 적법한 처형이었다고 하더라도 정부 체통을 위해 처벌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논란을 초래한 데 대해 다소간 벌을 주라고 지시함. 공보처의 허위발표와 군 관계자들의 조사방해는 확인되지만, 이승만이 구체적인 위장공비 작전이나 허위 증거 작성을 직접 지시했다는 사실까지 확인된 것은 아님.

1951년 12월 16일 군법회의는 관련 지휘관의 위법한 명령과 살해 책임을 인정하여 유죄판결을 내렸음. 당초 정부가 설명한 적법한 처형이 아니라 위법한 명령과 집단살해였음이 같은 해 재판에서도 드러났음.

대한민국 정부가 국무원 고시 제14호로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을 선언한 사건. 이승만 대통령의 이름을 따 ‘이승만 라인’, 또는 ‘평화선’으로 불린 경계 안의 해양자원 보호와 어업 관할을 주장한 조치로, 독도를 그 범위에 포함했음.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와 함께 일본 어선의 활동을 제한해 온 맥아더 라인이 폐지될 예정이던 상황에서 한국 어민과 수산자원을 보호하려는 목적이 있었음. 그러나 공해상에 일방적으로 관할권을 설정한 방식에는 일본뿐 아니라 미국·영국 등도 반대했으며, 강화조약이 승인한 해상 경계는 아니었음. 평화선은 해양자원 보호와 독도 관리, 앞선 조약 수정 요구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와 연결되면서 한일 어업·외교 갈등의 쟁점이 되었고, 1965년 한일어업협정으로 새로운 질서가 마련됨.

이승만은 대통령 재선을 위한 직선제 개헌을 관철하려고 임시수도 부산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야당 의원들을 압박했음.

1952년 5월 25일 0시, 한국전쟁 중 임시수도 부산과 경남·전남·전북 일부 지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됨.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당시 제도 아래 재선이 어려워진 이승만은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고 있었음. 국회의 내각책임제 개헌 움직임과 이승만의 집권 연장 시도가 충돌하면서 헌정 위기가 발생했음.

계엄 아래 야당 의원들이 체포되었고, 5월 26일에는 국회의원들이 탄 통근버스가 헌병대로 끌려감. 이승만은 5월 27일 성명에서 게릴라 활동과 공산 세력의 연계를 계엄의 명분으로 내세웠음. 그러나 실제로는 야당의 대통령 교체·내각책임제 개헌 움직임을 공산주의 음모와 결부시킨 사건 조작과 의원 탄압이 벌어졌음. 이승만은 직선제 개헌에 동의하지 않으면 국회를 해산시키겠다고 압박했으며, 부통령 김성수는 의원 체포에 항의해 사임했음.

미국과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도 계엄과 의원 체포에 우려를 표시했음. 국회 해산은 실행되지 않았으나, 의회에 대한 강압은 7월 4일 발췌개헌안 통과까지 이어짐. 부산정치파동은 전쟁 중의 비상권력이 대통령의 재선과 헌법 변경을 위해 사용된 사건이었음.

국회가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 국무원에 대한 불신임제 등을 결합한 발췌개헌안을 가결한 사건. 이승만이 요구한 직선제와 야당이 제기한 의원내각제 구상의 일부를 발췌하여 묶은 제1차 헌법 개정. 국회 의결은 7월 4일, 개정헌법 공포는 7월 7일로 구분.

국회에서 재선이 어려워진 이승만이 선출 방식을 바꾸려던 상황에서 계엄과 국회의원 체포, 국회해산 압박이 동반된 부산정치파동. 자유로운 의사결정이 위축된 가운데 재석 166명 중 163명의 찬성으로 통과된 개헌.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는 제도를 처음 도입했으나 집권자의 재선을 위한 강압적 개정이라는 문제를 함께 남긴 사건. 이승만이 8월 5일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되는 제도적 기반.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군사령부와의 사전 합의 없이 송환을 거부한 한국인 반공포로 약 2만 7천 명을 석방하도록 지시함. 포로송환 문제의 합의로 정전협정 체결이 가까워지자, 분단을 유지하는 정전에 반대하던 한국 정부가 협상에 개입한 사건임.

이승만은 당일 성명에서 자신의 책임으로 석방을 명령했다고 밝혔음. 미국과 유엔군사령부는 지휘체계와 기존 약속을 위반한 일방 조치로 받아들였고, 정전 협상도 다시 위기에 놓였음. 이후 미국 특사와 한국 정부의 교섭은 정전협정 이행 협조, 상호방위조약, 군사·경제 지원을 묶어 진행되었음.

석방은 이승만의 대미 협상력을 보여 주는 동시에 동맹 내부의 신뢰와 군사적 통제를 흔든 행동이었음. 상호방위조약 요구와 미국의 특사 파견 논의가 석방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조약 체결을 이 한 사건만의 결과로 설명해서는 안 됨.

미국 워싱턴에서 변영태 외무부장관과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서명함. 이승만 정부가 정전 이후의 재침략 가능성에 대비해 요구한 안보 보장이 제도화되는 단계였으며, 8월 가조인과 양국의 후속 교섭을 거쳐 이루어짐.

조약은 외부 무력공격의 위협에 대한 협의와 공동 대응, 상호 합의에 따른 미군의 한국 주둔 근거를 마련했음. 다만 제3조는 각국의 헌법상 절차에 따라 공동 위험에 대응하도록 규정했으므로, 무조건적인 자동 참전을 약속한 문서로 표현할 수 없음. 미국 역시 한국의 일방적인 북진으로 다시 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통제 장치를 추구했으며, 한미동맹은 안보 지원과 한국군 통제에 관한 협상의 결과로 형성됨.

양국의 비준서 교환을 거쳐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발효됨. 1953년 10월 1일 서명된 조약이 법적 효력을 갖게 되면서 한미동맹의 제도적 기반이 마련됨.

발효에 앞서 한미 양국은 한국군을 유엔군사령부의 작전통제 아래 두고 미국이 군사·경제 원조를 제공하는 합의의사록을 마련했음. 이승만 정부는 장기적인 안보와 지원을 확보하는 한편, 독자적인 북진 구상을 제약받았음.

자유당이 부결된 헌법개정안의 결과를 뒤집어 가결을 선포하고 제2차 개정헌법을 공포한 사건. 11월 27일 표결에서 재적의원 203명 가운데 찬성 135명으로 필요한 136명에 미달했으나, 11월 29일 203명의 3분의 2인 135.333…을 사사오입하면 135명이라는 논리로 부결 선언을 번복한 처리.

당시 대통령인 이승만에게만 중임 제한을 적용하지 않는 예외를 두어 세 번째 이후의 출마도 가능하게 한 개헌. 국무총리제 폐지, 대통령 궐위 시 부통령의 승계, 경제조항 개정 등도 함께 포함한 변화.

특정 집권자를 위한 임기 제한 철폐와 의결 정족수 왜곡으로 헌법의 권력 통제 기능을 약화한 사건. 반대 의원들의 호헌운동과 야당 재편을 촉진한 정치적 계기.

이승만 대통령이 5월 1일 국제노동절을 공산주의 선전과 연결하여 비판하고, 이와 구별되는 노동자의 기념일을 정하도록 지시함. 국가기록원에 소개된 시정명령은 반공주의가 노동자의 기념일과 노동운동을 재편하는 기준으로 작용한 사실을 보여 줌.

이 지시에 따라 대한노총은 1958년 제11차 전국대의원대회에서 단체 결성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로 정했음. 1957년의 대통령 지시와 1958년 노동단체의 결정은 구별됨. ‘근로자의 날’이라는 명칭의 법제화는 이후 1963년에 이루어졌음.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경쟁자 조봉암이 진보당 사건으로 처형됨. 2011년 대법원 재심에서 간첩과 진보당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 부분은 무죄로 바로잡힘.

1959년 7월 31일 조봉암에게 사형이 집행됨.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지낸 그는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에 맞서 출마한 뒤 평화통일과 사회개혁을 내세운 진보당을 이끌었음. 이승만 정부는 1958년 1월 조봉암과 진보당 간부들을 간첩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했고, 2월에는 진보당의 정당 등록을 취소했음.

1심은 조봉암의 간첩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항소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고,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됨. 7월 30일 재심 청구가 기각된 바로 다음 날 형이 집행됨. 국사편찬위원회에 수록된 해설은 이승만이 1심 판결을 비난하며 사법부를 압박한 사실을 설명하고, 진실화해위원회가 사건을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한 정치탄압으로 규정했음을 전함.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재심에서 간첩 혐의와 진보당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 부분을 무죄로 판단했음. 다만 무기불법소지는 별도로 유죄를 인정하면서 형의 선고를 유예했음. 재심은 사형의 핵심 근거가 된 간첩 및 국가변란 혐의를 사법적으로 부정한 판결이었음.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이 정부통령 선거에 행정·경찰 조직을 동원해 대규모 부정을 저질렀음. 마산의 항의 시위와 경찰의 유혈진압은 4월혁명으로 이어짐.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제5대 부통령 선거가 실시됨. 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의 사망으로 이승만의 당선이 사실상 확실해진 뒤에도, 자유당은 고령의 대통령을 승계할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부정선거 계획을 강행했음. 선거 준비에는 최인규 내무부장관을 비롯한 행정·경찰 조직과 자유당 기획기구가 관여했음.

투표함에 미리 표를 넣는 사전투표, 3인조·9인조 공개투표, 대리·무더기 투표, 야당 참관 방해와 폭력이 동원됨. 이는 일부 투표소의 우발적 위반을 넘어 국가기관과 여당 조직이 결합한 선거권 침해였음. 선거 당일 마산에서 부정을 규탄하는 학생·시민들의 시위가 일어났고, 경찰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했음.

정부와 경찰은 시위를 공산당의 선동으로 몰아가려 했음. 마산 경찰은 친공 구호를 적은 쪽지를 사망한 시위자들의 주머니에 넣는 증거조작까지 벌였으며, 관련 경찰들은 정권 붕괴 후 무고 혐의로 구속됨. 이승만도 4월 13일 담화에서 공산당 배후 혐의를 제기했음. 시위의 실제 원인이었던 부정선거와 경찰 발포에 대한 책임 추궁을 용공 혐의로 돌린 대응이었음. 다만 경찰의 구체적인 증거조작을 이승만이 직접 지시했다는 사실까지 확인되는 것은 아님.

정부가 시위를 탄압하는 가운데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자 항의는 다시 확대됨.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은 이승만 정권의 책임을 묻는 전국적 민주화운동으로 발전했음.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의 네 번째 당선을 확정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4월혁명과 정권 붕괴를 촉발한 직접적 계기가 됨.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정부의 3·15 부정선거와 시위 탄압에 항의하는 학생·시민의 대규모 시위가 서울과 부산·광주 등 전국으로 확산된 사건. 마산의 유혈진압,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 발견,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에 대한 정치폭력배의 습격이 항의 확산의 배경. 대학생뿐 아니라 중·고등학생과 도시 노동자·빈민 등 여러 계층이 참여한 저항.

서울대학교 학생들도 각 단과대학에서 거리로 나와 시위에 참여했으며, 경찰의 발포로 서울대생 6명이 목숨을 잃음. 전국적으로 경찰의 실탄 발포에 따른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정부는 주요 도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을 투입함. 이승만이 승인한 계엄의 효력은 실제 선포 이전의 경찰 발포 시점까지 소급 적용됨. 대통령의 계엄 승인과 경찰 지휘부·현장 경찰의 구체적인 발포 책임은 구별되는 문제.

계엄 이후에도 항의가 계속되어 4월 25일 교수단 시위와 26일 이승만의 하야 발표로 이어짐. 국가의 유혈진압에 따른 희생 속에서 국민의 선거권과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시민 저항이 장기집권 체제를 무너뜨린 전환점.

서울대학교

4월혁명과 전국적 퇴진 요구 속에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음. 사임서는 다음 날 국회에 송부되었으며, 국회 본회의의 사임서 선포는 5월 3일 이루어짐.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은 국민의 요구에 따라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음. 3·15 부정선거와 경찰의 유혈진압에 맞선 학생·시민의 저항이 이어졌고, 전날 대학교수단까지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선 뒤였음. 성명에는 정부통령 선거의 재실시, 이기붕의 공직 퇴진, 내각책임제 개헌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도 포함됨.

4월 26일은 하야 의사를 공개한 날임. 대통령기록관이 공개한 기록에 따르면 이승만의 사임서는 4월 27일자로 국회의장에게 송부되었고, 대통령기록관은 이날을 공식 사임일로 설명함. 국사편찬위원회 헌정사 자료는 5월 3일 제35회 국회 제13차 본회의에서 4월 27일자 사임서가 선포되었다고 구분함.

이승만의 퇴진으로 1948년부터 이어진 집권은 끝났고, 허정의 과도정부를 거쳐 내각책임제 개헌과 제2공화국 수립으로 이어짐. 하야는 대통령 개인의 결단만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부정선거를 거부하고 국가폭력에 맞선 시민들의 지속적인 저항이 가져온 정치적 결과였음.

이승만은 이날 미국대사와의 면담에서 전날 밤에야 3·15 선거가 불법적으로 치러졌음을 알았다고 설명했음. 그러나 대사의 4월 19일과 21일 보고에는 이미 이승만에게 부정선거와 경찰 탄압을 직접 설명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음. 전날 밤에야 알았다는 설명은 이미 직접 통보받은 기록과 어긋나는 해명이었음.

하야 성명 전문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들어와서 우리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 알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사랑하는 우리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하여 우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여기에 대해서 내가 아래 말하는 바를 할 것이며, 한 가지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바는 이북에서 우리를 침략하려고 공산당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말도록 힘써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첫째는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며,

둘째는 지난 번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고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고,

셋째는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애게 하기 위해서 이미 이기붕 의장이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가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넷째는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하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할 것이다.

이상은 이번 사태를 당해서 내가 굳게 결심한 바이니 나의 이 뜻을 사랑하는 모든 동포들이 양해해 주어서 이제부터는 다 각각 자기들의 맡은 바를 행해 나가며 다시 질서를 회복시키도록 모든 사람이 다 힘써주기를, 내가 사랑하는 남녀 애국동포들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승만은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떠남. 그는 생전에 귀국하지 못하고 1965년 현지에서 사망했음.

1960년 5월 29일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하와이로 출국했음. 그는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4월 28일 경무대를 떠나 서울의 사저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긴 상태였음. 출국은 4월혁명으로 집권이 끝난 이후의 일이며, 대통령 재임 중의 해외 방문과 구별됨.

이승만의 하와이 체류는 장기화되었고, 그는 생전에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음.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사망한 뒤에야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왔음. 국가기록원은 이 시기를 망명으로 설명함.

start 2건

이승만이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남. 양력 1875년 3월 26일은 음력 2월 19일에 해당함.

1875년 3월 26일, 이승만이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내동에서 태어남. 음력으로는 같은 해 2월 19일임. 아버지는 이경선, 어머니는 김해 김씨였으며, 본관은 전주임. 어린 시절 이름은 승룡이었음.

출생지는 평산이지만, 그는 어린 시절 가족을 따라 서울로 옮겨 성장했음. 그는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 전주 이씨 왕실의 먼 후손이었음. 그는 서울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유년기를 보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이 국무총리로 선출됨.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선출했음. 전날 시작된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내세운 임시헌장을 채택한 결과였음. 당시 이승만은 미국에 있었으므로 상하이 현장에서 정부 수립 회의를 주도하거나 곧바로 현지에 부임한 것은 아니었음.

임시헌장은 국민의 평등과 여러 자유, 선거권과 피선거권, 교육·납세·병역의 의무 등을 규정했음. 이승만의 선출은 미국을 무대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를 신생 임시정부의 지도부에 포함시킨 결정이었음. 이때의 직책은 국무총리였고,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같은 해 9월 여러 임시정부 계통의 통합과 정부 조직 개편을 추진하는 과정에서였음.

milestone 1건

제헌국회가 의결한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을 국회의장 이승만이 서명·공포하고 같은 날 시행한 사건. 헌법안의 국회 의결일은 7월 12일이며, 헌법 제정·공포를 기념하는 제헌절은 7월 17일로 구분되는 연혁.

유진오와 행정연구위원회의 공동안을 심의 원안으로, 권승렬안을 참고안으로 삼아 만든 전문과 10장 103조의 국가 기본법. 민주공화국과 국민주권, 국민의 자유권과 사회적 기본권, 단원제 국회, 대통령·부통령, 사법기관 등을 규정한 국가 운영의 설계.

초안의 의원내각제 구상이 이승만의 대통령제 주장과 조정되면서 대통령중심제에 국무총리제 등의 내각제 요소를 결합한 체제. 대통령과 부통령을 국회가 선출하고 4년 임기에 한 차례 중임을 허용한 방식. 정부 수립에 앞서 국가기관을 구성할 법적 근거를 마련한 헌정의 시작.

대한민국 헌법
end 1건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90세로 사망했음. 7월 27일 국내에서 가족장이 치러졌고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됨.

1965년 7월 19일 대한민국 제1·2·3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90세로 사망했음. 그는 1960년 4월혁명 이후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같은 해 5월 29일 하와이로 떠나 체류하고 있었음.

장례는 1965년 7월 27일 고국에서 가족장으로 거행되었고,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됨. 국가기록원은 사망과 장례행렬에 관한 사진 및 장례 관련 문서를 보존하고 있음.

갱신 2026-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