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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 여성재단이 여자아이의 자존감과 진로 시야를 넓히기 위해 ‘딸을 직장에 데려가는 날’을 미국 전역에서 처음 시행함.

이 캠페인은 학교와 직장에 여성의 노동 경험을 연결해, 사춘기 여자아이들이 직업 세계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상상하도록 기획되었다. 스타이넘은 재단 공동 창립자로서 캠페인의 상징적 지지자였지만, 실제 개발과 전국 확산에는 재단 대표 마리 윌슨과 교사·보호자·사업장의 협력이 핵심적이었다.

2003년부터는 남자아이도 포함하는 ‘Take Our Daughters and Sons to Work Day’로 확대되었다. 이 변화는 성평등 교육이 여자아이의 기회 확대뿐 아니라 모든 아동의 성역할 고정관념을 다루는 방향으로 넓어진 과정을 보여준다.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의 도박판에서 두목 김기환이 학교 후배와 교도소 동기 등 20대 청년들을 규합해 부유층에 대한 증오를 행동으로 옮기자며 총 8명으로 이루어진 범죄 조직을 결성함. '가진 자의 것을 빼앗고 그들을 죽인다'는 행동강령과 '배반자는 처형한다' 등의 원칙을 세우고 각자 10억원을 모을 때까지 범행을 계속한다는 목표를 정함. 무차별 연쇄살인으로 이어지는 지존파 사건의 출발점.

지존파 사건

새너제이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세계 개발자 회의. 곧 도입될 파워PC(PowerPC) 프로세서를 비롯해 QuickDraw GX(베타), 애플스크립트, 컬러싱크(ColorSync), 윈도우용 퀵타임, AOCE, 사운드 매니저 3.0 등 다수의 차세대 매킨토시 기술이 개발자들에게 소개됨. PowerPC 기반 맥 전환을 한 해 앞두고 플랫폼 대전환을 준비하던 회의.

제45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일본관을 단독으로 구성하는 대표 작가로 참가함. 초기 인피니티 네트와 소프트 스컬프처부터 신작까지 전시하고 《Mirror Room (Pumpkin)》을 주요 작품으로 선보이며 국제적인 재평가를 확산시킴.

샘 닐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쥬라기 공원》에서 고생물학자 앨런 그랜트 박사를 연기함. 공룡 테마파크에서 살아남으려는 과학자의 역할을 맡아 영화의 중심 인물로 등장함.

영화가 전 세계적인 흥행 성공을 거두면서 앨런 그랜트는 샘 닐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배역이 됨.

일본 정부 관계자 5명이 서울 용산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사무실에서 닷새간 비공개로 피해 생존자 16명의 증언을 직접 들음. 일본 정부가 피해자 증언을 공식 청취한 절차로, 대표단은 일정을 마친 뒤 기자회견에서 진상규명 노력을 약속함. 다만 2014년 일본 정부 검증 보고서에 따르면 고노 담화 초안은 청취 종료 전 이미 작성되었고, 청취 내용에 대한 사후 대조 조사는 실시되지 않은 경과.

고노 요헤이 당시 내각관방장관

1993년 7월 30일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와타나베 미치오를 꺾고 총재에 당선됨. 자민당이 창당 이래 처음으로 정권을 잃고 야당으로 전락한 직후 당을 이끌게 된 자리. 그러나 호소카와 연립정권의 성립으로 그는 총리대신을 거치지 못한 최초의 자민당 총재로 남음.

고노 요헤이

지존파 조직원들이 충남 논산 두계역 인근에서 20대 여성을 납치해 성폭행한 뒤 살해하고 암매장한 사건. 조직은 피해자에게 얼굴을 보였다는 이유로 살해를 결정했고, 두목 김기환이 조직원들에게 살인을 시범 보였다는 취지의 진술도 전해짐.

고노 요헤이 일본 관방장관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정부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이른바 ‘고노 담화’를 발표함. 담화는 위안소의 설치·관리와 여성들의 이송에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으며, 모집 과정에서도 감언·강압 등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사례가 많았고 관헌이 직접 가담한 사례도 있었다고 인정함.

고노 장관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에 사죄와 반성의 뜻을 밝히고, 역사 연구와 교육을 통해 문제를 기억하겠다고 표명함. 김학순을 비롯한 피해생존자들의 공개 증언과 법적 투쟁, 군 관여 자료의 발견과 시민사회의 진상규명 요구가 일본 정부의 기존 부인 입장을 바꾸는 데 영향을 미친 결과.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대한 군과 관헌의 관여, 모집 과정의 강제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죄한 핵심 문서. 다만 법적 책임이나 국가배상 의무를 인정한 것은 아니어서 이후에도 책임 인정과 배상을 둘러싼 논쟁이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