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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1919년의 기록 35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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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 다카시가 일본 총리에 취임해 최초의 본격적인 정당 내각을 구성함. 하라 내각은 국제연맹 참여를 지지했으나 정부와 여론 내부의 회의론에 직면한 상황. 인종 평등 제안은 연맹 참여의 국내 정치적 명분을 강화하려는 목적과 미국·영국 자치령의 일본인 이민 문제 해결 목적이 결합된 외교 의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안상호의 일본인 배우자와 자녀들을 소개하며 그의 가정을 ‘일선동체’와 ‘내지화’의 성공 사례로 선전함. 기사에서 안상호는 자신을 일본 사람과 같다고 표현하고 조선식 생활과 조선인 사회에서 거리를 두고 있다고 밝힘.

1918년 말 나라시노 포로수용소에 인플루엔자가 유행해 독일군 포로 25명이 사망함. 수용소장 사이고 도라타로도 1919년 1월 1일 고열에도 신년 인사를 위해 수용소를 찾은 뒤 같은 날 사망함. 사망한 포로 25명은 수용 중 다른 원인으로 숨진 5명과 함께 현재의 후나바시 시영 나라시노 영원에 안장됨.

나라시노 수용소

1911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1918년 무렵 경성전수학교(뒷날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함. 같은 해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 서기로 임용된 뒤 공주지방법원 서산지청·홍성지청 서기로 옮겨 1920년대 초까지 법조 실무에 종사함. 근대 학교 교육을 받은 뒤 사법 실무로 사회에 진출한 출발점.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전후해 결성된 신한청년당에 김규식이 참여하고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할 한국 대표로 선정됨. 영어와 국제 정세에 능통했던 김규식을 통해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사회에 호소하기로 결정.

김규식 (우사)

1919년 1월 18일 제1차 세계대전 승전 연합국 대표들이 파리에 모여 강화 조건과 전후 국제 질서를 논의하는 회의를 개막. 미국 윌슨·프랑스 클레망소·영국 로이드 조지·이탈리아 오를란도의 '4대 거두'가 핵심 결정을 주도. 20세기 전반 국제 질서의 틀을 짠 거대한 외교 무대의 출발.

인종 평등 제안 (1919)

대한제국 초대 황제이자 조선 제26대 국왕인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함. 갑작스러운 죽음을 두고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퍼지면서 민중의 반일 감정이 크게 고조됨. 고종의 국장(인산일)을 앞두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들어, 며칠 뒤 3·1운동이 폭발하는 사회적 배경이 됨.

재일 조선인 유학생 실행위원들이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작성에 착수. 백관수·김도연·이광수가 기초위원으로 선출되고, 실제 선언서 문안은 이광수가 전담한 것으로 알려짐. 완성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한국어·일본어·영어로 마련하며 도쿄에서 독립을 선포하기 위한 조직과 문건을 갖춘 단계.

이광수 (춘원) 기초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이 일본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조선청년독립단 이름으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 집회에는 약 600명이 참석했으며, 선언식 뒤 약 400명이 가두시위를 시도했으나 일본 경찰의 저지와 강제 해산으로 주동자들이 검거됨. 선언서와 관련 문건은 같은 날 일본 정부와 의회, 각국 외교 공관과 언론사 등에 발송되었으며, 국내 독립운동 세력에 자극을 주어 3·1운동 준비를 촉진한 선도적 사건으로 평가.

삼일절 기미독립선언서 이광수 (춘원) 기초

천도교 측 최린의 요청을 받은 최남선이 독립선언서 본문과 함께 파리강화회의 대표들에게 보내는 청원서, 일본 정부에 대한 통고문 등을 1919년 2월 20일 무렵 완성함. 당대의 이름난 문장가였으나 후환을 우려해 민족대표 명단에는 서명하지 않음. 선언서 끝에 붙은 공약 3장의 작성자를 두고는 최남선 단독설과 한용운 관여설이 함께 전해짐.

일본 전권위원 마키노 노부아키가 국제연맹 규약 위원회에 인종 평등 수정안을 정식 제출함. 연맹 회원국 국민인 외국인에게 인종이나 국적을 이유로 법률상·사실상 차별을 두지 않고 평등하고 공정한 대우를 부여하자는 원칙을 제시한 내용. 즉각적인 제도 통일보다는 원칙을 선언하고 구체적 실행을 각국 정부에 맡기는 구상으로 설명했으나 위원회에서 채택되지 못함.

인종 평등 제안 (1919)

인종 평등 조항이 빠진 국제연맹 규약 초안이 예비 강화 회의 본회의에 보고되자 마키노 노부아키가 발언에 나섬. 이날 규약 내용에 대한 토론이 예정되지 않았음을 들어 즉각 논의를 요구하지 않고, 일본 측 제안을 후속 논의 단계에서 다시 제출해 각국 대표의 검토를 요청하겠다는 뜻을 밝힘. 제안을 철회하지 않고 추후 재상정할 방침을 공식화한 것으로, 4월 11일 인종 평등 수정안 재제출로 이어짐.

인종 평등 제안 (1919)

경남 거창에 있던 곽종석의 문인 윤충하가 파리강화회의에 유림 대표 명의의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자고 제안함. 청원 방식은 한국의 독립 의사를 국제 여론에 호소하는 방안으로 설정됨. 유림계의 독립청원 논의가 곽종석을 중심으로 구체화됨.

파리장서운동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천도교계가 기독교의 이승훈, 불교의 한용운 등과 손잡아 종교계 연합 전선을 구성함. 천도교 15인·기독교 16인·불교 2인 등 모두 33인이 민족대표로 서명하기로 하고 손병희를 총대표로 추대함. 유림 측의 참여 교섭은 시간이 촉박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함.

기미독립선언서

천도교가 경영하던 보성사 인쇄소에서 사장 이종일이 독립선언서 약 2만 1천 부를 비밀리에 인쇄함. 2월 27일 밤 급박하게 진행되었으며, 인쇄 도중 종로경찰서 형사에게 발각될 뻔한 위기를 넘김. 완성된 인쇄본은 2월 28일부터 3월 1일에 걸쳐 천도교·기독교·불교 조직과 학생들을 통해 전국으로 배포됨.

이광수가 1월 31일 고베를 거쳐 상하이로 건너가 영문 2·8 독립선언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윌슨·클레망소·로이드 조지 등에게 전문으로 보냄. 또한 상하이 영자신문에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보도하도록 요청하며 한국의 독립 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리려 한 활동.

이광수 (춘원)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한국의 독립을 선언함.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시민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섬. 비폭력 만세 시위로 시작된 이날의 선언이 전국으로 번지는 3·1운동의 출발점.

3·1 독립선언

천도교·기독교·불교 세 종교계가 연합해 추진한 민족대표 33인은 당초 탑골공원에서 독립을 선언하려 했으나, 유혈 충돌을 피하기 위해 장소를 인사동 음식점 태화관으로 옮김. 1919년 3월 1일 오후 이곳에 모인 대표들은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만세를 부르고 스스로 일제 경찰에 연락해 체포됨.

한편 같은 날 탑골공원에는 학생과 시민 수천 명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에 나섬.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의 함성은 곧 평양·의주 등 전국으로, 나아가 국외 한인 사회로까지 들불처럼 번져 거족적 항쟁으로 발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