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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1941년 3월 16일 태극기에 조국 독립을 향한 결의를 붓글씨로 적고 서명해, 중국에서 활동하던 벨기에 신부 매우사(샤를 메우스)에게 건넴. 미국으로 건너간 매우사를 거쳐 도산 안창호 가족에게 전해졌고 1985년 독립기념관에 기증됨. 임시정부 지도자의 친필이 담긴 항일 유산으로, 2008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뒤 2021년 보물로 승격됨.

태극기

1941년 5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평의원에 선임되고 9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에 참여해 10월 감사를 맡음.

같은 해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위원 및 경기도위원으로도 이름을 올렸으나, 이 부분은 이후 친일반민족행위결정 취소소송에서 구체적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이 취소됨.

김성수 (189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미외교위원부 설치 규정을 공포하고 이승만에게 대미교섭의 전권을 부여했음.

1941년 6월 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하는 규정을 공포하고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임명했음. 임시정부는 신임장을 통해 그에게 미국과 교섭할 전권을 맡겼음. 이승만은 이전부터 사용한 Korean Commission이라는 대외 명칭을 이어갔지만, 이 조직은 1919년 구미위원부와 구분되는 제도적 근거를 갖추었음. 같은 해 그는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출판하여 일본의 팽창정책이 미국과의 충돌로 이어질 위험을 경고했음.

주미외교위원부는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 대일전쟁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여할 자격, 한국광복군에 대한 군사 지원을 확보하려 했음.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뒤에는 재미한인이 일본인과 같은 적성외국인으로 취급되지 않도록 지위를 개선하는 일에도 힘썼음. 이승만은 미국인 후원단체를 활용한 여론 활동과 미국 정부를 향한 청원을 병행했음.

그러나 미국 정부의 임시정부 불승인 방침은 바뀌지 않았음. 주미외교위원부의 활동은 한국 독립의 요구와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리는 데 기여했지만, 독립운동 측이 원한 정부 승인과 공식 참전 지위를 확보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음.

이승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