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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전쟁 이후의 국제질서 원칙을 담은 공동선언 발표. 영토 확장 반대, 민족자결, 경제협력, 항행의 자유, 무력 사용 포기와 군축 등의 원칙을 제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공식 참전하기 전 공개된 선언으로, 1942년 연합국 선언 서명국들이 그 원칙을 재확인. 전후 국제기구 창설과 국제연합 헌장 협상에서도 주요 원칙으로 반영.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로 이어지는 주요 육상 연결로를 차단하면서 도시 봉쇄가 본격화된 날. 독일 북부집단군의 진격과 핀란드군의 북방 압박 속에서 레닌그라드는 외부와의 연결이 크게 끊겼고, 이후 라도가호를 통한 제한적인 보급에 의존하는 장기 포위 상태에 들어간 전환점.

포위는 1944년 1월 27일까지 872일간 이어졌으며 식량 부족과 혹한, 포격과 공습으로 막대한 군인·민간인 희생이 발생. 도시를 직접 점령하기보다 봉쇄와 기아를 통해 굴복시키려 한 전쟁 방식의 참혹성을 보여주는 제2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의 대표적 사건.

1941년 10월 태평양전쟁 지원을 위해 결성된 친일 단체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림. 학병·징병 독려와 전시 동원을 표방한 단체의 창립에 가담함. 유림 활동을 넘어 전쟁 협력 단체로까지 친일 행적이 확대된 사례.

이명세 (1893년)

일제가 만주사변, 중일전쟁을 거쳐 인도차이나반도로까지 진격하자 미국은 격렬한 항의와 더불어 각종 경제적 제재를 가함. 이에 일제는 1941년 12월 7일, 선전포고 없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습, 태평양전쟁 일으킴. 이에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 이때 1940년 9월에 창설된 한국광복군이라는 정규군대를 보유하고 있던 임시정부는 진주만공습 직후인 1941년 12월 10일, 즉각적으로 일제에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겠다는 뜻을 밝힘.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

우리는 3,000만 한국인 및 정부를 대표하여 중국·영국·미국·네덜란드·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및 기타 모든 나라의 대일 선전 포고를 삼가 축하한다. 이것은 일본을 물리치고 동아시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다. 이에 특히 아래와 같이 성명서를 낸다.

  1. 한국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하였고, 일개 전투 단위가 되어 *축심국(軸心國)에 대하여 선전 포고한다.

  2. 1910년 합병 조약 및 일체 불평등 조약이 무효임을 거듭 선배포한다. 아울러 반침략 국가들이 한국 내에 가지고 있는 합리적 기득권익을 존중한다.

  3. 왜구(倭寇)를 한국·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완전히 축출하기 위하여 혈전으로 최후의 승리를 이룩한다.

  4. 맹세코 일본이 비호하여 조성된 *창춘(長春) 및 난징 정권(南京政權)을 승인하지 않는다.

  5. *나구선언(羅邱宣言) 각 조를 단호히 주장하며 한국 독립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용하며 이것으로 인해 특히 민주 전선의 최후 승리를 미리 축하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인), 외무부장 조소앙(인)

대한민국 23년(1941) 12월 10일

평양의 기생 권번에서 교육받은 김학순이 17세 무렵 기생 영업을 위해 양아버지와 함께 중국 베이징으로 감. 베이징의 한 식당에서 일본군에게 붙잡혀 트럭에 실려 간 뒤 베이징 인근 일본군 부대의 위안소에서 성폭력을 강요당함.

약 넉 달 뒤 조선인 상인의 도움으로 위안소에서 탈출함. 이후 중국에서 생활하다가 해방 뒤인 1946년 귀국함.

김학순 (여성운동가)

미국·영국·소련·중국을 포함한 26개국이 워싱턴에서 ‘연합국 선언’에 서명. 서명국들은 대서양 헌장의 원칙을 지지하고 추축국에 맞서 자국의 군사·경제 자원을 동원하며 단독 강화를 체결하지 않기로 합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제안한 ‘United Nations’ 명칭이 공식 문서에 처음 사용된 사례. 선언에는 최초 26개국에 이어 전쟁 기간 여러 국가가 추가로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