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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진급 축하연에 참석해 술을 마신 뒤 숙소로 돌아와 잠을 자던 중 새벽에 총탄에 맞아 살해당함.

1948년 7월 12일 대한민국 제헌국회가 태극기를 새 나라의 국기로 공식 제정함. 다만 이때까지도 '흰 바탕에 태극과 4괘'라는 원칙만 있을 뿐 통일된 작도법이 없어 다양한 규격의 태극기가 함께 쓰임. 대한민국 정부의 국기로서 태극기의 법적 지위가 확립된 시점.

제헌국회가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인 제헌헌법을 서명·공포하고 당일 시행함. 헌법안은 1948년 7월 12일 국회에서 통과된 뒤 7월 17일 공포됨.

제헌헌법은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규정하고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선언함. 국민의 기본권과 단원제 국회, 대통령·부통령제, 국무총리제, 사법부와 탄핵재판소·헌법위원회 등의 국가 운영 체계를 마련함.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 국가의 기본 질서와 통치 구조를 확정한 사건으로, 이후 7월 17일은 헌법 제정·공포를 기념하는 제헌절로 지정됨.

제헌 국회의원들의 간접선거로 치뤄짐. 대통령 선거는 오전 10시, 부통령 선거는 오후 2시.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이시영이 부통령으로 당선.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200명 중 200명 출석. 당선은 134표 필요

김구와 김규식, 남북협상에 참여한 정당·사회단체를 중심으로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 남북한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상황에서 외세 의존을 배제하고 남북협상을 통한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을 계속 추진한다는 방침을 표방. 남북협상의 성과와 합의를 이어가기 위한 정치적 연대기구로 활동함.

김규식 (우사) 공동 결성 지도자

1948년 11월부터 5개월 동안 진행된 초토화 작전으로 진압군은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함. 중산간 마을 134개가 모두 불에 탐. 제주 4.3 사건 희생자의 2/3인 9,700 여명이 초토화 작전으로 목숨을 잃음.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 주둔 14연대 군인 2,000여 명이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한 사건. 김지회와 지창수 등 남로당 계열 군인들이 주도. 이승만 정부 수립 2개월 만에 발생한 이 사건으로 진압 과정에서 전남 동부 지역의 민간인들이 대거 희생됨. 반란군에 의해 약 150명이 살해된 것에 비해 정부 측 진압 군경에 의해 살해된 민간인은 약 2,500여 명에 달하는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남겼음.

제주 4·3 사건 당시 군경의 무자비한 초토화 작전을 정당화하려는 시도. 같은 해 11월 21일 제주도 전역 확대. 중산간 마을을 소각하여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초래한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이어짐. 당시 일부 마을에는 소개령이 전달되지 않거나 전달되기 전 진압군이 들이닥쳐 집단학살을 당함.

그동안에도 분별없는 총살이 곳곳에서 벌어지긴 했지만 그 강도와 피해 규모 면에서, 그리고 전 지역에 걸쳐 동시에 벌어졌다는 점에서 11월 중순 이후는 이전 기간과 뚜렷한 차이가 있음.

유엔 총회가 프랑스 파리에서 결의 217 A(III)로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함. 선언 제1조에서 모든 인간이 존엄과 권리에 있어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난다고 천명하고, 제2조에서 인종·피부색·성별·언어·종교·출신 등에 따른 구별 없이 선언에 규정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명시함.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국제연맹 규약에 포함되지 못했던 인종적 비차별 원칙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보편적 국제인권 규범의 핵심 원칙으로 명문화되는 흐름을 보여주는 사건.

약 한 달 보름만에 계엄령 해제. 이 계엄령은 법적 근거 없이 선포된 불법적인 조치였고, 수많은 무고한 희생을 나은 학살의 배경이 됨.

참고로 계엄법은 1949년 11월 24일 법률 제69호로 최초로 제정.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선거에 관한 사무를 행정기관인 내무부 산하 '선거위원회'가 관장함. 선거관리기구가 집행부에 소속돼 독립성과 공정성을 확보하지 못한 구조였음. 훗날 3·15 부정선거를 거치며 독립된 선거관리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배경이 됨.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한 알프레드 샤힌이 어머니 메리 샤힌의 도움으로 호놀룰루에 자신의 기성복 의류 회사를 설립함. 샤힌은 알로하 셔츠와 여성복을 중심으로, 가족의 맞춤복 사업을 대량 생산이 가능한 기성복 사업으로 확장함.

회사는 이후 ‘Shaheen’s of Honolulu’과 ‘Surf ’n Sand’ 브랜드를 통해 원단 디자인·실크스크린 인쇄·봉제·유통을 한곳에서 처리하는 수직 통합 체제를 구축함. 1949~1950년 수입 원단 공급이 막히자 고물상에서 구한 부품으로 염색·가공 장비를 제작해 자체 직물 생산에 나섰고, 이는 알로하 셔츠를 관광 기념품 수준에서 디자인과 품질을 갖춘 패션 상품으로 끌어올리는 기반이 됨.

알로하 셔츠 (하와이안 셔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