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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1949년의 기록 66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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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 영국 총리가 트루먼에게 서한을 보내 대일 선언의 현 문안에 영국 정부를 대표해 서명할 뜻을 밝히고 조속한 발표를 요청한 일. 경제활동을 다룬 제11항의 문구 수정을 제안한 기록. 이튿날 장제스의 전문 동의와 함께 미국·영국·중국 세 정부 명의의 발표로 이어진 협의.

미국·영국·중국이 일본의 항복 조건을 제시하면서 카이로 선언의 이행을 요구한 사건. 일본의 주권을 혼슈·홋카이도·규슈·시코쿠와 연합국이 정할 작은 섬들로 제한한다는 제8항의 명시. 점령과 비군사화, 전쟁범죄 처벌 및 평화적 경제활동의 원칙이 함께 제시되면서 이후 항복과 강화조약의 기준 마련.

스즈키 간타로 일본 총리가 기자회견에서 포츠담 선언을 카이로 선언의 반복으로 낮게 평가하고, 묵살하며 전쟁을 계속한다는 취지로 발언한 일. 미국이 감청한 일본 방송의 번역문에 남은 기록. ‘묵살’이라는 단어의 의도와 번역에는 논쟁이 있지만, 이를 단순한 번역 실수 하나가 원자폭탄 투하를 초래했다는 인과관계로 단정할 수는 없음.

미국 트루먼 대통령과 영국 애틀리 총리, 소련 스탈린이 참가한 포츠담 회담이 1945년 8월 2일 종료됨. 연합국 지도자들은 독일의 비군사화·비나치화와 점령 관리, 배상 문제, 외무장관회의 창설 등 전후 질서에 관한 주요 합의 내용을 발표함. 동아시아에서는 회담 중 발표된 포츠담 선언이 일본에 항복을 요구해 한반도의 식민지 지배 종식 및 전후 처리와 연결되었음. 포츠담 선언일(7월 26일)과 회담 종료일(8월 2일)은 구분됨.

포츠담 선언

미군이 일본 히로시마에 우라늄 건배럴 방식의 원자폭탄 Little Boy를 투하함. 오펜하이머가 이끈 로스앨러모스는 사용된 핵무기의 설계·개발을 담당했지만 실제 투하의 군사적 명령권자는 아니었음. 히로시마시는 정확한 사망자 수를 확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하며 1945년 말까지 약 14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함. 피해자에는 일본인뿐 아니라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대만 출신자와 중국인, 외국인 포로 등도 포함됨.

1945년 8월 7일 중국 시안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한국광복군 지도부가 미국 전략사무국(OSS) 국장 윌리엄 도노반 등과 회담해 독수리작전에 따른 국내 진입과 항일 비밀공작 협력을 논의함. 한국광복군 제2지대는 미군과 합동 첩보·통신 훈련을 수행했지만, 일본의 항복으로 예정했던 국내 침투 작전은 실행되지 못함.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미국 정보기관의 전시 협력을 보여주는 주요 사건이며, 이것이 곧 미국 정부의 임시정부 공식 승인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음.

몰로토프 소련 외무인민위원이 모스크바의 일본 대사에게 대일 선전포고 성명을 전달하며 7월 26일 연합국 선언에 참여한다고 밝힌 일. 성명에서 다음 날인 8월 9일부터 일본과 전쟁 상태에 들어간다고 통고. 일본이 소련을 통해 평화를 중재받으려던 구상을 무너뜨리고 포츠담 선언을 지지하는 나라가 네 나라로 확대된 전환점.

미군이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 상공에서 플루토늄 내폭형 원자폭탄 Fat Man을 폭발시킴. 트리니티 시험에서 검증한 것과 같은 기본적인 내폭 방식의 무기였으며 로스앨러모스 연구소가 개발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함. 나가사키의 공식 추모기관 자료는 1945년 말까지 약 7만~7만4천 명이 사망하고 약 7만5천 명이 부상한 것으로 추산함. 중국인·조선인 강제노동자와 외국인 전쟁포로도 피해자에 포함됨.

일본 정부가 천황의 국가 통치권을 해치는 요구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해석 아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할 뜻을 밝힌 일. 8월 10일 스위스와 스웨덴을 통하여 미국·영국·소련·중국에 전달한 외교 통보. 모든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인 최종 수락과는 구별되며, 천황의 지위에 대한 연합국의 답신을 기다리던 단계.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번스가 미국·영국·소련·중국을 대표하여 일본의 8월 10일 통보에 답신한 일. 항복 순간부터 천황과 일본 정부의 통치권이 연합국 최고사령관에게 종속되며, 최종 통치 형태는 일본 국민이 자유롭게 표명한 의사로 정해진다는 내용. 천황 통치권의 무조건 보장을 요구한 일본 측 해석을 그대로 승인한 답신은 아님.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현지 시각 8월 14일 오후 7시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회신을 포츠담 선언의 완전한 수락으로 판단한다고 발표한 일. 맥아더를 항복 접수의 연합국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연합군에 공격 중지를 명령했음을 알린 발표. 정식 항복문서 서명은 이후 절차라는 점을 함께 밝힌 기록.

일본 정부가 포츠담 선언의 조항을 수락한다는 조서의 공포 사실과 이행 의사를 네 연합국에 통보한 일. 천황이 정부와 대본영에 필요한 항복 조건의 서명 권한을 부여하고, 군대에 전투 중지와 무기 인도 등을 명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내용. 앞선 10일의 조건부 수락 제안과 11일 연합국 회답을 거친 최종 결정.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전날 녹음한 종전 조서가 일본 시각 8월 15일 정오 라디오로 방송된 일. 일본 국민에게 포츠담 선언 수락과 전쟁 종결 결정을 알린 방송으로, 이른바 옥음방송. 정부의 14일 수락 결정과 9월 2일 항복문서 서명 사이에 이루어진 대국민 공표.

상고가 8월 13일 기각되었으나 이틀 뒤 광복을 맞아 8월 17일 이극로·최현배·이희승·정인승 4명이 풀려남. 석방된 회원들은 곧바로 학회를 재건하고 한글날 행사를 되살림. 중단되었던 우리말 사전 편찬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계기.

히로시마·나가사키 폭격 직후 오펜하이머가 대표로 서명한 임시위원회 과학패널이 전쟁장관 헨리 스팀슨에게 서한을 제출함. 더 강력한 핵무기가 개발될 가능성이 높고 효과적인 군사적 방어책을 마련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며, 핵무기 우위만으로 미국의 장기적 안전을 보장할 수 없고 전쟁 자체를 방지하기 위한 국제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함.

조선인 귀환자들을 태운 우키시마호가 일본 마이즈루만에서 폭발해 침몰한 사건. 해방 직후 귀향길에서 발생한 대규모 인명 피해로, 탑승 인원과 희생자 규모 및 침몰 경위를 둘러싼 조사와 진상규명 요구가 이어진 참사.

서울 수송동 중동학교 강당에서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창립총회를 개최한 날. 해외에서 귀환을 기다리거나 곤경에 처한 동포를 돕기 위해 기부금과 물자를 모으기로 한 민간 구호활동. 당시 매일신보의 보도일은 9월 2일.

일본 정부와 군 대표가 도쿄만의 미주리호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포츠담 선언의 조건을 공식 수락한 사건. 일본군의 적대행위 중지와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권한을 받아들인 전쟁 종결의 군사적·정치적 전환점. 이후 점령을 끝내고 국가 간 법적 전쟁상태와 전후 권리관계를 정리하는 강화조약 협상의 출발점.

오타와 주재 소련대사관 암호 담당자 이고르 구젠코가 소련의 대캐나다·대미 첩보 활동을 보여주는 100여 건의 비밀문서를 가지고 대사관을 빠져나왔다. 그는 언론사와 캐나다 당국에 자료를 전달하려 했고, 이후 보호를 받으며 망명했다. 이 사건은 캐나다 내 소련 첩보망을 드러내고 전후 냉전의 시작을 상징하는 사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