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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1949년의 기록 37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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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호퍼가 이끄는 하버드 마크 II 운영팀에서 하버드 대학교 계산 연구소 마크 II의 릴레이(Relay) #70 (패널 F) 사이에 끼어 컴퓨터 고장을 유발하던 나방을 발견하고 "First actual case of bug being found"라고 기록. 이후 이 일화를 자주 언급하여 버그, 디버깅이라는 용어가 업계에 널리 퍼짐.

샘 닐이 북아일랜드 오마에서 나이절 존 더멋 닐(Nigel John Dermot Neill)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남. 아버지는 뉴질랜드인, 어머니는 영국인이었으며 아버지는 당시 영국군에서 복무하고 있었음.

어린 시절 '나이절'이라는 이름 대신 '샘'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배우로서도 샘 닐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함.

한글날에 맞춰 『조선말 큰사전』 1권을 펴냄. 1929년 편찬회 조직 이후 18년 만에 나온 첫 결실로, 우리 민족의 손으로 만든 첫 한국어 대사전의 출발. 이후 1949년 2권이 이어지고 학회 개칭 뒤 『큰사전』이라는 이름으로 완간됨.

김규식·원세훈·안재홍·홍명희 등 중도파 인사들, 1947년 10월 민족자주연맹 결성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선출. 좌우합작위원회와 미소공동위원회 대책협의회 등 기존 중도파 조직을 통합해 극좌·극우의 대립을 넘어서는 독자적인 정치세력 결성을 추진함.

date: 1947-12-20 title: 민족자주연맹 발족하고 김규식 위원장 취임 type: start entities:

중도 좌·우파 정당과 사회단체·개인들이 참여한 민족자주연맹, 1947년 12월 20일 서울 천도교강당에서 결성대회를 열고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추대. 독점자본주의와 무산계급 독재를 모두 배제하고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결합한 중도 노선을 표방.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남북 지도자 회담과 통일정부 수립을 추진하며 이듬해 남북협상의 정치적 기반으로 기능함.

김규식 (우사)

중도 좌·우파 정당과 사회단체·개인들이 참여한 민족자주연맹, 1947년 12월 20일 서울 천도교강당에서 결성대회를 열고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추대. 독점자본주의와 무산계급 독재를 모두 배제하고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결합한 중도 노선을 표방.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남북 지도자 회담과 통일정부 수립을 추진하며 이듬해 남북협상의 정치적 기반으로 기능함.

김규식 (우사) 초대 위원장

1947년 스웨덴 기업인 에를링 페르손이 전년도 미국 뉴욕 여행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베스테로스에 여성복 매장 Hennes를 개점. Hennes는 스웨덴어로 ‘그녀의 것’을 뜻하는 이름으로, 합리적인 가격의 패션을 더 넓은 고객에게 제공하려는 구상에서 출발. 오늘날 글로벌 패션 기업 H&M의 기원이 된 첫 매장.

H&M

고투(孤鬪)는 이극로 선생의 호. 일제강점기 한글을 지키고 다듬는 데 평생을 바친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가 살아온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과 우리말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역사 - 구한말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부터 해외 유학기, 조선어학회 수난 사건, 해방 직후를 담은 자서전적 수필.

오펜하이머가 미국 원자력위원회(AEC) 일반자문위원회 의장을 맡음. 1952년까지 핵연구·핵무기 개발과 원자력 정책에 대한 주요 자문 역할을 수행하며 전시 과학책임자에서 전후 미국 핵정책의 핵심 자문역으로 위치가 바뀜.

3·1절 발포 사건 이후 고조된 도민들의 저항 의식과 미군정의 강압적인 통치에 반발한 상태에서,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미군정의 단독선거 추진에 반대, 총파업과 무장 봉기 발생.

당시 상황

  • 당시 전후 한국의 독립 문제 관련 1946년 11월 14일, 제2차 유엔총회에서 결의안이 채택
  • 이 결의안을 근거로 유엔은 한국 내 선거와 국회 구성, 정부수립 등의 문제를 지원하기 위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을 1947년 1월 한국에 파견
  •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한반도에서 인구 비례에 따른 총선거 실시를 추진
  • 소련은 1948년 1월 22일, 위원단의 38선 이북 지역 입북을 거부
  •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지역 내에서의 선거 감시를 결정. 즉, 5월 10일 남한 단독 선거로 최종 결의

당시 김구, 김규식 등은 1947년 말부터 남한 단독 선거 반대, 남북 협상 주장을 공개적으로 펼치고 있었음. 단독 선거는 분단의 교착으로 이어지고 이는 미국의 단독 정부 수립 전략이라고 해석하했기 때문. 따라서, 1948년 초부터 파업, 시위, 선거 저지 운동 등 다양한 방법이 준비되고 있었음.

새벽 2시, 남로당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 또한 경찰, 서북청년회 숙소와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지목해 습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