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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1949년의 기록 66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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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 9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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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점령하 네덜란드에서 식량과 연료가 극도로 부족했던 ‘기아의 겨울’을 겪음. 당시의 영양실조와 전쟁 경험은 전후 건강과 발레 진로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1945년 연합군의 마나·차우하운드 식량 투하로 구호를 받은 민간인 가운데 한 명으로 기록됨.

1944년 10월 25일 필리핀 사마르섬 동쪽 해상에서 일본 해군 구리타 함대가 미군 호위항공모함 부대와 교전. 미군 구축함과 함재기 등이 격렬하게 저항했으며 일본 함대가 철수함. 레이테만 해전의 주요 교전 가운데 하나.

제2차 세계대전기 미주(美洲) 관계 조정 업무를 거쳐, 1944년 12월 국무부의 서반구(라틴아메리카) 담당 차관보로 임명됨. 민주당 루스벨트 행정부에서 일한 공화당계 인사로서 미국의 대(對)라틴아메리카 정책을 총괄. 1945년 8월까지 재임하며 평생에 걸친 라틴아메리카 관여의 기반 마련.

존 폰 노이만과 오스카어 모르겐슈테른이 《게임 이론과 경제 행동》에서 불확실성 아래의 선택을 다루는 기대효용 이론을 공리적으로 정식화함. 합리적 행위자가 일정한 선호 공리를 충족할 경우, 가능한 결과의 효용을 확률로 가중한 기대효용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선택한다는 모형을 제시함. 이후 기대효용 이론은 미시경제학과 의사결정 이론의 표준적 규범 모형으로 자리 잡았으며, 전망 이론이 실제 인간의 판단과 선택이 이 모형에서 체계적으로 벗어난다고 보이며 비판적으로 확장한 기준점이 됨.

전망 이론

신상옥이 1944년 일본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해 회화를 공부. 중학생 시절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경험을 바탕으로 미술 공부를 지속.

이듬해 징병을 피해 귀국한 뒤 광복을 맞았고, 이후 최인규 감독 문하에서 영화 제작을 수학. 미술에서 출발해 촬영·편집을 익히며 영화감독으로 활동할 기반을 마련.

박정희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함. 해방 전까지 만주국군 장교로 복무한 경력으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대륙 침략 체제에 속한 군사조직에서 활동한 시기.

1938년 실험 성공 이후 약 5년 동안 20곳 넘는 기업의 거절을 겪은 칼슨이 1944년 바텔기념연구소와 협력 관계를 맺음. 복사 원리를 일정한 품질로 반복하는 자동 장비로 바꾸기 위해 연구 인력과 설비를 투입하기 시작한 단계. 바텔의 연구와 할로이드의 후속 개발이 결합해 914의 상용화로 이어진 연결고리.

Xerox 914 체스터 칼슨

미 해군 장교 그레이스 호퍼가 하버드 계산팀에서 마크 1의 초기 프로그래머로 활동. 수학 문제를 기계가 수행할 연산 순서로 바꾸고 오류를 찾아 고치는 작업이 별도의 전문 업무로 발전하던 시기의 참여로, 이후 기계의 운용 지식을 정리한 매뉴얼 집필과도 연결.

하버드 마크 1

전쟁 말기 사할린에서 생산한 자원을 일본 본토로 운송하기 어려워지자, 일본이 사할린의 조선인 노동자 일부를 본토의 광산과 공장으로 다시 이동시킴. 먼저 동원되어 온 노동자들이 새로운 사업장에 배치되는 동안 사할린에 남겨진 가족들과 분리됨. 해방 뒤에도 가족의 소재와 귀환 경로가 갈라지는 이중 이산의 배경이 됨.

1944년 12월부터 9차례 이어진 공판 끝에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승 징역 2년 6개월, 정인승·정태진 징역 2년 등을 선고함. 사전 편찬을 민족운동의 형태로 규정한 예심 결정에 따라 치안유지법 내란죄가 적용됨. 학문 활동 자체를 독립운동으로 처벌한 판결.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크림반도 얄타에서 회담. 독일의 점령과 비무장화, 폴란드 국경과 정부 구성, 소련의 대일전 참전 조건, 국제연합 창설 등을 협의.

세 정상은 1945년 4월 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기구 창설회의를 열기로 합의하고, 안전보장이사회 비절차적 사안에 상임이사국의 동의를 요구하는 표결 방식을 확정.

국제연맹의 실패와 유엔 창설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복역 중 만 27세로 사망한 윤동주. 광복을 반년 앞두고 삶을 마감하여 자신의 유고 시집이 출간되는 모습을 보지 못한 죽음. 사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정체불명의 주사에 관한 증언과 생체실험 의혹은 확정된 직접 사인과 구분해야 할 내용. 이후 유족과 벗들이 남은 원고를 모아 작품을 전한 출발점.

태평양전쟁 이오지마 전투 중 미 해병대원 6명이 수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세우는 장면을, AP통신 사진기자 조 로젠탈이 촬영함(두 번째 게양 장면). 이틀 뒤 신문에 실려 폭발적 반향을 일으켰고 그해 퓰리처상을 받음. 전쟁채권 모금과 해병대 기념비의 모델이 되며, 성조기가 미국의 희생과 승리를 응축한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로 각인됨.

성조기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사망한 윤동주의 유해를 유족이 수습하여 고향 용정에 안장한 과정. 해방을 몇 달 앞두고 생애를 마감한 청년 시인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사건. 이후 남겨진 원고와 가족·친구들의 기억이 작품 보존의 핵심 자원이 된 시점.

음속 부근에서 항력과 진동이 커지고 조종성이 달라지는 문제를 실제 비행으로 조사하기 위해, 미국 육군항공대가 벨 항공기에 실험기 제작을 맡김. 전투 임무나 여객 운송보다 비행 데이터를 얻는 데 초점을 둔 연구기 사업이 출발함.

초기 기체는 XS-1로 불렸으며 이후 X-1 명칭으로 알려짐. 개발 계약에 관한 자료들의 일자 표기가 달라 이 기록에서는 계약이 체결된 월까지만 표시함.

벨 X-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