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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1949년의 기록 37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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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기구에 관한 연합국 회의가 폐막하며 50개국 대표가 국제연합 헌장에 서명. 헌장은 국제 평화와 안전 유지, 국가 간 우호관계 발전, 국제협력과 인권 존중을 기구의 목적으로 규정.

총회·안전보장이사회·경제사회이사회·신탁통치이사회·국제사법재판소·사무국의 6개 주요 기관을 설치하고,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의 지위와 표결 절차를 명시. 헌장은 각국의 비준을 거쳐 1945년 10월 24일 발효.

오펜하이머가 이끄는 로스앨러모스 연구진이 뉴멕시코 사막에서 플루토늄 내폭형 핵장치 Gadget을 폭발시켜 세계 최초의 핵폭발 시험에 성공함. 실험은 1945년 7월 16일 새벽 실시되었으며 로스앨러모스가 개발한 내폭 시스템의 실제 작동 가능성을 입증함. 이후 같은 기본 방식이 나가사키에 투하된 Fat Man에 사용됨.

『독립신문』 충칭판이 1945년 7월 20일 제7호 발행.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비정기적으로 간행된 중국어 판본의 마지막 확인 호수로, 임시정부의 대외 활동과 한국광복군 관련 소식, 국제 정세 및 항일전선 관련 기사를 수록.

미군이 일본 히로시마에 우라늄 건배럴 방식의 원자폭탄 Little Boy를 투하함. 오펜하이머가 이끈 로스앨러모스는 사용된 핵무기의 설계·개발을 담당했지만 실제 투하의 군사적 명령권자는 아니었음. 히로시마시는 정확한 사망자 수를 확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하며 1945년 말까지 약 14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함. 피해자에는 일본인뿐 아니라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대만 출신자와 중국인, 외국인 포로 등도 포함됨.

미군이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 상공에서 플루토늄 내폭형 원자폭탄 Fat Man을 폭발시킴. 트리니티 시험에서 검증한 것과 같은 기본적인 내폭 방식의 무기였으며 로스앨러모스 연구소가 개발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함. 나가사키의 공식 추모기관 자료는 1945년 말까지 약 7만~7만4천 명이 사망하고 약 7만5천 명이 부상한 것으로 추산함. 중국인·조선인 강제노동자와 외국인 전쟁포로도 피해자에 포함됨.

상고가 8월 13일 기각되었으나 이틀 뒤 광복을 맞아 8월 17일 이극로·최현배·이희승·정인승 4명이 풀려남. 석방된 회원들은 곧바로 학회를 재건하고 한글날 행사를 되살림. 중단되었던 우리말 사전 편찬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계기.

히로시마·나가사키 폭격 직후 오펜하이머가 대표로 서명한 임시위원회 과학패널이 전쟁장관 헨리 스팀슨에게 서한을 제출함. 더 강력한 핵무기가 개발될 가능성이 높고 효과적인 군사적 방어책을 마련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며, 핵무기 우위만으로 미국의 장기적 안전을 보장할 수 없고 전쟁 자체를 방지하기 위한 국제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함.

오타와 주재 소련대사관 암호 담당자 이고르 구젠코가 소련의 대캐나다·대미 첩보 활동을 보여주는 100여 건의 비밀문서를 가지고 대사관을 빠져나왔다. 그는 언론사와 캐나다 당국에 자료를 전달하려 했고, 이후 보호를 받으며 망명했다. 이 사건은 캐나다 내 소련 첩보망을 드러내고 전후 냉전의 시작을 상징하는 사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의 재판 증빙 자료로 경성고등법원에 보내졌던 사전 원고가 경성역(지금의 서울역) 화물 창고에서 발견됨. 10여 년에 걸친 어휘 수집과 집필의 결실이 사라질 뻔하다 극적으로 돌아온 것. 이 원고를 바탕으로 『큰사전』 간행이 재개되었으며, 원고는 뒷날 국가지정기록물 제4호로 지정됨.

광복 직후 사원자치위원회가 매일신보 발행을 이어가던 가운데, 1945년 10월 2일 미군정청이 매일신보사를 접수함. 이후 오세창 등 새 간부진을 중심으로 신문사가 재편되고, 매일신보는 서울신문으로 이름을 바꿔 발행되는 방향으로 정리됨.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해방 직후 새 언론 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

매일신보

국제연합 헌장이 중국·프랑스·소련·영국·미국 등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과 다른 서명국 과반의 비준을 거쳐 발효. 국제연합이 국제 평화와 안전 유지, 국가 간 협력, 인권 존중을 목적으로 하는 상설 국제기구로 공식 출범.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가하지 못했던 폴란드가 이후 헌장에 서명하면서 창설 회원국은 51개국으로 구성. 10월 24일은 이후 ‘유엔의 날’로 지정.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 1945년 11월 23일 김구·이시영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환국 제1진으로 김포비행장에 도착. 미군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입국함. 김규식은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한 지 약 32년 만에 귀국해 국내 정치 활동과 통일정부 수립운동에 나섬.

광복 후 매일신보사에 사원자치위원회가 조직되어 신문 발행을 이어가다가, 1945년 10월 2일 미군정이 매일신보사를 접수함. 미군정은 주주 대표와 사원자치위원회와의 조정을 거쳐 오세창을 사장으로 하는 새 간부진을 구성. 새 간부진은 1945년 11월 23일부터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바꾸고 지령을 이어 속간함.

매일신보

일제강점기에 이 일대는 명치정(明治町)으로 불렸고 성당도 종현성당·종현본당으로 불림. 1945년 광복 후 동 이름이 명동(明洞)으로 바뀌면서 성당 이름도 오늘날의 명동성당(명동본당)으로 자리잡음. 지명 변화가 성당의 통칭으로 굳어진 계기.

딘 애치슨이 이끄는 국무부 원자력위원회 산하 자문단이 「국제 원자력 통제에 관한 보고서」를 완성함. 오펜하이머는 데이비드 릴리엔털 등과 자문단에 참여해 보고서 작성에 큰 역할을 했으며, 핵물질 채굴과 핵무기 생산 가능 시설을 국제적인 원자력개발기구가 관리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안함. 보고서는 같은 달 28일 공식 공개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