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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보건기구 설립한 날을 세계 보건의 날 (World Health Day)로 지정. 매년 전 세계 핵심적인 보건 문제를 선정, 이를 위해 한 해 동안 국제적, 지역적, 지방적 행사를 조직하기 위해 제정.

1948년 4월 19일부터 열리는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을 위해 평양으로 향함. 회의 뒤 김구, 김규식 등이 5월 초 서울로 돌아온 것과 달리 이극로는 남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북에 잔류함. 이로써 평생을 바친 한글운동의 무대를 남에서 북으로 옮긴 전환점.

김규식, 1948년 4월 21일 원세훈 등 민족자주연맹 대표단을 이끌고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이동.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전체회의에는 참석하지 않고 김구·김일성·김두봉과 남북 지도자 회담을 진행하며 남북한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을 막고 통일정부를 구성하는 방안을 협의함.

남북 지도자들은 외국군 철수, 철수 이후 전조선 정치회의 소집, 단독정부 수립 반대, 내전 방지 등에 합의했으나 이를 실행할 제도적 수단을 마련하지 못함. 김규식은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으며, 남북협상은 분단정부 수립을 저지하지는 못했지만 분단에 반대한 정치세력의 대표적인 통일정부 수립 시도로 남음.

김규식 (우사)

김익렬 9연대장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이 구억국민학교에서 직접 만나 협상을 벌임. 주요 내용은 무장대의 하산과 무장 해제, 군의 안전 보장. 합의를 봤으나 다음날 납치 사건 등이 발생하면서 겉잡을 수 없는 유혈 충돌로 치닫게 됨.

합의 내용은,

①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본다

②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③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

또한 합의된 귀순절차는 회담 다음 날에 모슬포 연대본부와 제주읍 비행장에 각각 귀순자 수용소를 설치하고 점차적으로 서귀포 성산포 등지에도 수용소를 세우되 군이 직접 관리하고 경찰의 출입을 통제한다는 것.

이들은 이후 행방불명된 것으로 기록. 당시 오라리 지역은 우익 단체인 대동청년단과 좌익 무장대 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곳. 이 방화사건은 평화회담을 깨고 5·10 단독선거를 저지하려는 무장대 측과 이를 진압하려는 우익 단체의 충돌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 피해를 양산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기록.

당시 오라리 연미마을에 거주하던 대동청년단 단원의 부인 2명은 마을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제주시 읍내로 피신. 이들은 살림살이를 챙기기 위해 잠시 마을로 다시 들어왔다가, 이를 인지한 마을 주민들(무장대 동조 세력)에 의해 납치. 마을 뒷산인 민오름으로 끌려가 이 중 1명은 사망.

우익 청년단(대동청년단)이 제주읍 오라리 마을에 방화한 사건. 미군정은 불타는 마을을 비행기와 지상에서 촬영하여 '제주도의 메이데이 (May Day on Cheju-Do)''라는 영상물로 제작, 무장대의 소행으로 왜곡 홍보. 이 사건으로 평화 협상 결렬. 연대장 김익렬은 현장 조사를 통해 방화 주체가 우익 청년단임을 밝혀냈으나, 미군정에 의해 묵살되고 교체.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하여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 국제연합임시위원단은 당시 접근할 수 없었던 북한지역의 선거를 유보한 채 남한지역만의 선거를 실시. 당시 4·3 사건의 여파로 제주도 내 3개 선거구 중 2곳(북제주 갑·을)에서 선거가 불가능해져 무효 처리. 국회의원 200석 중 198명 선출.

국회선거위원회에서는 북제주군 갑, 을의 투표가 원만히 시행되지 못하여, 군정장관에게 무효선포를 건의. 결국 무효 처리됨

  • 북제주군 갑구: 73투표구 중 31개구 투표 (등록유권자 27,560명 투표자 11,912명)
  • 북게주군 을구 -61투표구 중 32개구의 투표 (등록한 유권자 20,917명, 투표자 9,724명)

선거 후 이날까지 제주도의 선거결과만이 국회선거위원회에 전달되지 않고 있었다고 함.

김규식, 남북협상을 마치고 귀환한 뒤 5·10 총선거에 대해 반대하지도 참여하지도 않았다는 ‘불반대·불참가’ 입장을 표명. 남한 단독정부 수립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선거를 물리적으로 저지하는 노선과는 거리를 둠. 이후 제도권 정부 수립 작업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김구와 함께 통일정부 수립운동을 계속함.

김규식 (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