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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1949년의 기록 66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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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이 일대는 명치정(明治町)으로 불렸고 성당도 종현성당·종현본당으로 불림. 1945년 광복 후 동 이름이 명동(明洞)으로 바뀌면서 성당 이름도 오늘날의 명동성당(명동본당)으로 자리잡음. 지명 변화가 성당의 통칭으로 굳어진 계기.

전쟁이 끝난 뒤 어머니와 함께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발레리나 소니아 가스켈에게 발레를 배움. 이후 런던에서 무용가를 목표로 활동했으나 전쟁기 영양실조의 영향과 신체 조건 등으로 전문 발레리나 진로가 현실적이지 않다는 판단을 받으며 연기 쪽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게 됨.

일본의 패전 이후에도 사할린에 남은 많은 한인이 한반도로 돌아오지 못함. 일본인 송환과는 달리 한인 귀환은 원활하게 추진되지 않았으며, 소련의 통치와 남북 분단·냉전, 한국과 소련 사이의 외교관계 부재 등이 겹치면서 미귀환 문제가 장기화함. 고국 가족과의 이산이 이어지는 가운데 현지 공동체의 생활과 귀환운동이 병행됨.

잭 울럼스가 플로리다 파인캐슬 비행장에서 X-1 1호기의 첫 활공시험을 수행함. B-29가 기체를 공중으로 운반한 뒤 분리했으며, 로켓 추진을 시작하기 전에 저속 조종성과 착륙 특성을 점검함.

이 단계는 곧바로 속도 기록에 도전한 것이 아니라 분리·조종·착륙 절차를 먼저 확인하는 과정이었음. 날짜는 NASA의 상세 비행 연표와 1세대 X-1 해설에 따른 것임.

벨 X-1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SCAPIN 제677호로 일본 정부의 행정권 행사 범위를 정하면서 울릉도·독도·제주도를 그 범위에서 제외한 조치. 한국 관련 섬들을 일본의 행정에서 분리한 중요한 점령기 문서. 다만 제6항에서 포츠담 선언에 따른 작은 섬들의 최종 처리에 관한 연합국 방침을 뜻하지 않는다고 명시하여, 행정 조치와 최종 영토 결정의 구별 필요.

서울 시천교회에서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 결성되고 홍윤옥이 위원장으로 선출된 사건.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의 노동 부문을 배경으로 출발한 전국적 노동단체이며, 1948년 대한노동총연맹 개칭과 1954년 총연합회 재편으로 이어진 전신 조직의 출범.

딘 애치슨이 이끄는 국무부 원자력위원회 산하 자문단이 「국제 원자력 통제에 관한 보고서」를 완성함. 오펜하이머는 데이비드 릴리엔털 등과 자문단에 참여해 보고서 작성에 큰 역할을 했으며, 핵물질 채굴과 핵무기 생산 가능 시설을 국제적인 원자력개발기구가 관리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안함. 보고서는 같은 달 28일 공식 공개됨.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의 임시정부 수립 방안을 협의하기 위해 덕수궁 석조전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본회의를 개최함. 협의에 참여시킬 한국의 정당·사회단체 범위를 둘러싼 대립으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1947년 재개된 제2차 회의도 결국 결렬됨. 황실 건물이 해방 후 국가 수립과 분단 문제를 논의하는 국제정치의 현장으로 사용된 사례.

덕수궁 석조전

해방 후 서울운동장에서 서울과 평양의 대항전이 다시 열렸음. 자유신문사가 주최했으며, 3월 25일과 27일 경기가 진행되었음. 오랫동안 경기를 기다린 관중의 관심도 높았음.

그러나 해방이 곧 자유로운 왕래의 정착을 뜻하지는 않았음. 군정과 38선에 따른 이동 제약, 분단의 심화 속에서 대회는 지속되지 못했고, 이 경기가 해방 후 처음이자 마지막 경평축구로 남았음.

경평축구대항전

일본에 남은 조선인의 귀환 의사를 등록하고 소지금·화물 반출 제한을 둔 계획송환의 시행. 재산과 생계기반을 충분히 옮기기 어려운 조건이 귀환을 제약하면서, 귀환 희망과 실제 이동 사이의 간격이 드러난 전환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