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맥아더 연합국 최고사령관에게 일본 점령 권한에 관한 지침을 전달한 일. 일본 정부를 통하여 통치하되 필요한 조치를 취할 최고 권한을 부여하고, 포츠담 선언을 일본과의 계약 관계로 해석해 점령 권한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미국 측 입장을 명시. 선언 수락이 실제 점령 통치의 원칙으로 구체화되는 과정.
조선어학회 사건의 재판 증빙 자료로 경성고등법원에 보내졌던 사전 원고가 경성역(지금의 서울역) 화물 창고에서 발견됨. 10여 년에 걸친 어휘 수집과 집필의 결실이 사라질 뻔하다 극적으로 돌아온 것. 이 원고를 바탕으로 『큰사전』 간행이 재개되었으며, 원고는 뒷날 국가지정기록물 제4호로 지정됨.
해방 뒤 38선을 경계로 남북의 철도 운영이 갈리면서 경의선의 남북 관통운행이 단절됨. 개성역은 남측 운행 구간의 북쪽 종착역이 되었고, 서울~개성 구간의 열차 운행은 계속되었음.
따라서 이날을 경의선의 모든 열차가 멈춘 날로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음. 이후 한국전쟁과 정전 체제 속에서 단절 지점과 운행 범위가 다시 달라졌으며, 전쟁 이후 남측 경의선은 문산을 중심으로 끊어진 노선으로 남게 되었음.
미군정, 매일신보사를 접수
광복 직후 사원자치위원회가 매일신보 발행을 이어가던 가운데, 1945년 10월 2일 미군정청이 매일신보사를 접수함. 이후 오세창 등 새 간부진을 중심으로 신문사가 재편되고, 매일신보는 서울신문으로 이름을 바꿔 발행되는 방향으로 정리됨.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해방 직후 새 언론 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
김성수, 미군정 군정장관 한국인 고문에 임명
미군정이 김성수를 포함한 한국인 11명을 군정장관 고문으로 임명함. 광복 이후 정치 활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는 초기 단계가 됨.
평양에서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가 시작됨. 대회는 10월 13일까지 이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조직됨. 북한은 10월 10일을 조선로동당 창건일로 기념하지만, 현 조선로동당은 이후 북조선로동당과 남조선로동당의 통합을 거쳐 1949년에 성립한 조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음.
해방 직후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김일성이 일반 대중 앞에 처음 공식적으로 등장해 연설함. 소련군이 점령한 북부 지역에서 항일 활동 경력을 내세운 김일성을 주민에게 소개한 대규모 정치 집회의 성격을 가짐.
이 행사는 해방 이후 북부 지역 정치 지도부가 재편되는 과정과 김일성이 정치적 지도자로 부상하는 초기 단계를 보여주는 사건. 당시 발표된 연설 요지는 이튿날 《평양민보》에 소개됨.
이승만, 33년 만에 귀국
이승만이 1945년 10월 16일 김포비행장에 도착했음. 이튿날 기자회견에서 개인 자격의 귀국임을 밝히고 자주독립과 단결을 호소했음.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이 김포비행장에 도착했음. 1912년 미국으로 떠난 뒤 33년 만의 귀국이었음. 일본의 패전과 해방으로 독립운동의 과제가 국내에서 어떤 국가를 세울 것인가의 문제로 바뀌던 시기에, 오랫동안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한 정치지도자가 국내 정치무대로 들어온 것임.
이튿날인 10월 17일, 이승만은 미군정청에서 존 하지 중장과 아널드 소장의 소개로 기자회견을 했음. 그는 자신이 임시정부 대표나 외교기관 책임자의 지위로 온 것이 아니라 평민의 자격으로 돌아왔다고 밝힘. 국내 사정은 차차 알아가겠다고 말하면서 자주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한 동포들의 협력과 단결을 강조했음.
이 기자회견은 귀국과 동시에 이승만이 어떤 자격과 명분으로 국내 활동을 시작했는지 보여주는 자료임. 장기간의 해외활동에서 국내의 자주독립국가 수립 운동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는 전환점이 됨.
오펜하이머가 전시 임무가 끝난 뒤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장직에서 물러남. 맨해튼 프로젝트의 핵무기 개발 과학책임자 시기를 마무리하고 이후 대학과 정부의 원자력 정책 자문 활동으로 무게중심을 옮김.
조병옥, 미군정 경무부장으로 발령
미군정이 조병옥을 경찰조직의 최고 책임자인 경무부장으로 발령함. 조병옥은 10월 26일 기자회견에서 경찰행정을 새롭게 하고 일제식 압박·위협 경찰을 청산하겠다는 방침을 밝힘.
국제연합 헌장이 중국·프랑스·소련·영국·미국 등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과 다른 서명국 과반의 비준을 거쳐 발효. 국제연합이 국제 평화와 안전 유지, 국가 간 협력, 인권 존중을 목적으로 하는 상설 국제기구로 공식 출범.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가하지 못했던 폴란드가 이후 헌장에 서명하면서 창설 회원국은 51개국으로 구성. 10월 24일은 이후 ‘유엔의 날’로 지정.
미군정청 외무과장 엔더스 소좌의 발표에 따른 1945년 10월 28일까지의 일본발 조선인 귀환자 누계 17만 6,015명. 당일 귀환자는 1만 2,553명이며, 같은 발표에 포함된 일본인 철수 인원은 군인 11만 55명과 일반인 9만 205명. 전체 해외 귀환자의 최종 합계가 아닌 시점별·경로별 행정 집계. 통계 기준일인 10월 28일과 《매일신보》 보도일인 11월 1일의 구별.
1945년 11월 3일 해방 직후 평양에서 조만식 등 민족주의 인사들이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조만식을 당수로 선출함. 이윤영·최용건 등이 지도부에 참여했으나, 뒤이어 신탁통치와 북부 지역 정치권력 재편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됨.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의 사건으로 제목에 '대한민국'을 국가 주체로 사용하는 것은 부정확함.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 1945년 11월 23일 김구·이시영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환국 제1진으로 김포비행장에 도착. 미군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입국함. 김규식은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한 지 약 32년 만에 귀국해 국내 정치 활동과 통일정부 수립운동에 나섬.
광복 후 매일신보사에 사원자치위원회가 조직되어 신문 발행을 이어가다가, 1945년 10월 2일 미군정이 매일신보사를 접수함. 미군정은 주주 대표와 사원자치위원회와의 조정을 거쳐 오세창을 사장으로 하는 새 간부진을 구성. 새 간부진은 1945년 11월 23일부터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바꾸고 지령을 이어 속간함.
광복 후 조선체육회 재건
광복 이후 조선체육회가 다시 조직됨. 강제 해산으로 끊겼던 체육단체의 활동을 재개함.
광복 후 국립박물관 개관
광복 이후 경복궁의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인수하여 국립박물관으로 개관. 식민 통치 아래 축적된 유물과 시설을 한국인이 운영하는 공공 박물관으로 전환한 출발점. 경주와 부여의 분관을 이어받고 이듬해 공주·개성으로 지역 거점을 넓혀 나간 과정. 이후 독자적인 발굴조사와 특별전, 사회교육으로 이어질 국가 문화유산 기관의 기반 마련.
29개국의 서명으로 국제통화기금(IMF) 설립협정이 발효하며 IMF 정식 출범. 같은 날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설립협정도 발효해 브레턴우즈 회의의 구상이 국제기구의 법적·제도적 틀로 구체화된 이정표. IMF의 금융업무 개시일인 1947년 3월 1일과 구분되는 공식 설립일.
전쟁 전 국민차로 설계된 폭스바겐 승용차의 전후 양산 재개.
원료와 전력 부족 속에서 영국 군정의 지시로 생산을 시작해 연말까지 55대를 조립. 훗날 ‘폭스바겐 비틀’로 알려진 이 차량이 회사의 전후 재건과 수출 성장을 견인.
버나드 러벨, 조드럴 뱅크에서 레이더 관측 연구 시작
맨체스터대학교의 버나드 러벨이 도시 전차의 전파 간섭을 피해 체셔의 대학 식물학 실험 부지에 레이더를 설치함. 전쟁 중 익힌 기술로 우주선을 연구하려던 시도에서 유성의 반사 신호를 관측했고, 이것이 전파천문 연구소의 출발점이 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