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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Chun Doo-hwanen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군인 출신 정치인이자 군사독재 통치자. 1979년 12·12 군사반란과 1980년 비상계엄 전국확대, 광주민주화운동의 무력 진압을 거쳐 권력을 장악하고 1980년 9월부터 1988년 2월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함. 퇴임 후 반란수괴·내란수괴·내란목적살인·뇌물수수 등으로 유죄가 확정된 인물.

1931년 경상남도 합천에서 태어나 대구공업고등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 육군 소위로 임관함. 1961년 육사 생도들의 5·16 군사정변 지지 행진을 주도한 뒤 박정희 정권 아래 주요 보직을 거쳤으며, 베트남전 참전과 특전·야전부대 지휘를 거쳐 1979년 국군보안사령관에 오름. 육사 동기·선후배를 중심으로 한 비밀 사조직 하나회는 그의 군내 권력 기반.

박정희 사망 뒤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을 겸한 전두환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연행과 병력의 불법 동원을 통해 군 지휘부를 제압함. 이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하고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정치인·학생의 불법 연행과 국회 봉쇄를 추진하며 민주화 요구를 억압함. 5·18 기간 계엄군은 시민에게 폭력을 가하고 집단발포와 최종 진압작전을 벌였으며, 전두환에게는 5월 27일 재진입작전과 관련해 확정판결에서 내란목적살인의 공동정범 책임이 인정됨. 이 책임과 5월 21일 집단발포의 구체적 명령자 규명은 구별되는 쟁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맡아 국가 운영에 개입한 뒤 최규하 사임과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를 거쳐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함. 7년 단임·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한 새 헌법과 민주정의당을 바탕으로 1981년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제5공화국을 출범시킴. 국민의 직접선거와 자유로운 정치적 경쟁을 제한한 집권 과정.

집권기에는 삼청교육대의 영장 없는 연행·구금과 강제노역, 공직자 강제숙정, 언론인 강제해직과 언론사 통폐합, 보도지침을 통한 보도 통제가 이루어짐. 대학생 강제징집과 녹화사업, 김근태 고문, 부천경찰서 성고문, 박종철 고문치사와 은폐 등 군·경찰·정보기관의 중대한 인권침해도 발생함. 형제복지원의 강제수용은 이전 정권부터 이어졌으며, 후대 진실화해위원회는 전두환 정부 시기에도 지속된 공권력의 관여와 국가의 관리·감독 방기를 확인함.

경제 안정화와 수출 확대, 3저 호황, 서울올림픽 유치 및 서울아시아경기대회 개최가 진행된 시기의 대통령이기도 함. 경제·사회 변화에는 정부 정책뿐 아니라 기업과 노동자의 활동 및 국제경제 여건이 함께 작용함. 노동조합 통제와 파업 진압, 정치적 자유의 제한은 성장 과정과 병존한 문제. 대외적으로 미국·일본과의 정상외교를 추진했으며, 1983년 버마 아웅산 묘소에서 북한 공작원들의 암살 시도를 피했으나 한국 수행원과 취재진 17명 등이 사망함.

1987년 4·13 호헌조치로 직선제 개헌 요구를 거부했으나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폭로와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을 거치며 전국적인 6월항쟁에 직면함. 노태우의 6·29선언을 수용하고 직선제 개헌에 이르렀으며, 1988년 2월 임기 종료와 함께 대통령직에서 물러남. 퇴임 이후 5공 비리와 광주 진압에 대한 국회 청문회, 고소·고발 및 수사가 이어짐.

1995년 구속된 뒤 1996년 1심에서 사형,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97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이 확정됨. 같은 해 12월 특별사면·복권으로 석방됐지만 추징금 납부 의무는 남았으며, 장기간의 미납과 재산 추적·환수 문제가 계속됨. 검찰이 추산한 정치자금 조성 규모와 법원이 뇌물수수로 인정한 금액은 구별되는 수치.

1988년 대국민 사과와 1989년 일부 책임을 언급한 발언이 있었으나 5·18 진압 지휘의 구체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말년 회고록에서도 책임을 부인함. 2020년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사건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항소심 중이던 2021년 11월 23일 사망해 형사재판은 확정판결 없이 종료됨. 2026년 2월 대법원이 회고록의 허위 서술에 대한 배상과 일부 표현의 삭제 없는 출판·배포 금지 판결을 확정함. 같은 해 4월에는 국가가 연희동 자택의 소유 명의를 전두환 앞으로 돌려 추징하려던 별도 소송의 패소가 확정되며, 사후에도 책임 추궁과 재산 환수의 법적 문제가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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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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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에서 정규 4년제 과정을 마친 11기생 156명의 졸업식이 열림. 졸업생들은 육군 소위로 임관하고 이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전두환과 노태우도 이 기수에 속한 인물.

전두환은 이후 특전부대와 야전부대, 대통령 경호 및 군 보안기관의 보직을 거침. 육사 동기·선후배 인맥은 훗날 하나회와 신군부 형성의 중요한 기반이 됨.

전두환이 제9보병사단 제29연대장을 맡아 베트남전에 참전함. 육군사관학교 졸업 뒤 특전부대와 육군 주요 보직을 거친 장교가 해외 전쟁에 부대를 지휘해 참여한 경력.

귀국 뒤 제1공수특전단장과 제1보병사단장 등을 거쳐 1979년 국군보안사령관에 오름. 이들 보직에서 축적한 지휘 경험과 군내 인맥은 이후 군부 내 영향력을 키운 기반.

전두환이 국군보안사령관에 임명됨. 군 내부의 보안·방첩·정보를 담당하는 기관을 지휘하게 되면서, 군내 인맥뿐 아니라 정보와 수사 조직까지 권력 기반으로 확보한 보직 이동.

그해 10·26 사건 뒤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까지 겸했으며, 이 조직과 하나회 인맥을 이용해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함. 군 보안·수사기관이 신군부의 권력 장악에 동원되는 출발점.

전군 주요지휘관회의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전두환 대장을 차기 국가원수로 추대할 것을 결의함. 최규하 대통령 사임 뒤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기에 군 지휘부가 특정 인물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조치.

전두환은 이튿날 육군 대장으로 전역하고 8월 27일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됨. 군 지휘부의 추대는 헌법상 대통령 선거 자체와 별개였으나, 신군부 지도자의 대통령직 장악을 뒷받침한 정치적 행동.

전두환이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제11대 대통령 취임식을 거행함.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로 선출된 뒤 공식적으로 대통령직에 취임한 시점.

취임사에서는 정의사회와 민주복지국가 건설 등을 제시했으나, 집권의 토대는 12·12 군사반란과 비상계엄 확대,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을 통한 권력 장악이었음. 유신헌법 아래의 취임과 1981년 새 헌법 아래의 제12대 취임은 구별되는 절차.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 다음 날 남덕우를 국무총리 서리로 기용하는 등 새 내각을 구성함. 남덕우는 박정희 정부에서 재무부 장관과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낸 경제 관료로, 신군부가 장악한 정치권력 아래 행정·경제 운영을 맡은 인물.

취임 당시 직함은 국무총리 서리였으며, 이번 조각은 1980년 8월 대통령 선출과 9월 1일 취임에 이어 전두환 정부의 행정부 구성을 구체화한 절차.

박정희 대통령 피살 뒤 1979년 10월부터 이어졌던 비상계엄이 해제됨. 1980년 5월 전국으로 확대되고 같은 해 10월 지역계엄으로 조정되었던 계엄 체제가 이로써 종료됨.

대법원은 신군부의 내란을 1980년 5월 광주 진압에만 한정하지 않고, 계엄 확대와 정치활동 규제 등이 연결된 일련의 강압행위로 판단함. 이에 따라 1997년 판결에서 5·18 내란행위의 종료 시점을 비상계엄이 최종 해제된 1981년 1월 24일로 정함.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제5공화국의 대통령 임기를 시작함. 1980년 헌법이 정한 대통령선거인단의 간접선거에서 당선된 뒤 이루어진 취임으로, 대통령 임기는 7년 단임으로 규정됨.

민주정의당이 집권당을 맡고 국가안전기획부·군 보안기관·경찰 등을 통한 권위주의 통치가 이어짐. 대통령의 중임 제한이 도입되었어도 대통령 직선제와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는 민주화운동이 계속된 체제.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을 공식 방문해 히로히토 일왕을 만나고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와 정상회담을 개최함. 앞선 대통령들의 비공식 방문과 구별되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첫 일본 공식 방문.

히로히토는 환영 만찬에서 양국의 불행한 과거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고, 이튿날 나카소네도 한국에 가한 고난에 대한 유감을 밝힘.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 표현과 한일 협력 확대가 함께 논의된 정상외교.

전두환 정부가 5·18 진상규명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관계장관대책회의를 열고 범정부 차원의 자료 수집·백서 작성·홍보 대책을 추진함. 국무총리실과 안전기획부를 중심으로 여러 기관이 참여했으며, 실무기구에 80위원회라는 명칭을 사용함.

이 기구의 구성과 운영은 2017년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가 국가기록원 소장 정부 문건을 발굴하면서 공식적으로 확인함. 당시 발표는 관련 자료의 수정·왜곡에 조직적 개입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했으나, 구체적인 활동 결과와 완성된 백서의 존재까지 모두 확인한 것은 아니었음.

전국 대학생들이 건국대학교에서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 결성 집회를 열자 경찰이 교내에 진입했고, 학생들은 건물 안에서 농성하며 맞섬. 대치는 10월 31일 진압까지 이어졌고, 사건을 통해 1,288명이 구속됨. 정부는 집회를 용공세력의 행동으로 규정했으며, 학생들은 반외세·반독재를 내세워 저항함. 전두환 정권 말기의 학생운동과 대규모 경찰 진압을 보여주는 사건.

전두환이 마지막 국무회의 등 일정을 마치고 대통령 임기를 종료함. 이튿날 제13대 대통령 노태우가 취임하면서 1980년 시작된 전두환의 대통령 재임이 끝남.

1987년 6월항쟁과 직선제 개헌을 거쳐 대통령 선출 방식은 바뀌었으나, 후임은 하나회와 신군부의 핵심 인물이었던 노태우였음. 퇴임 이후 국회 청문회와 수사·재판을 통해 5공 비리와 군사반란, 광주 진압 책임에 대한 추궁이 본격화됨.

백담사에 머물던 전두환이 국회 5공비리조사특별위원회와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의 연석청문회에 출석함. 두 특별위원회가 미리 제시한 125개 항목의 서면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재임 중 비리 의혹과 광주 진압 책임에 관해 증언함.

전두환이 핵심 책임과 관련 혐의를 부인하면서 야당 의원들의 항의와 여야 공방이 이어졌고, 회의는 여러 차례 정회 끝에 파행으로 마무리됨. 공개 증언만으로 진압의 구체적 명령 체계와 책임 문제가 해소되지 않았으며, 관련 쟁점은 이후 수사와 재판으로 이어짐.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12·12 군사반란과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에 관한 조사결과를 발표함. 군 자료와 관계자 면담을 통해 공수부대의 대검 사용, 시민에 대한 가혹행위, 건물 옥상 저격수의 조준사격 등을 확인함.

위원회는 신군부의 군권 장악이 5·17 조치와 광주 무력진압, 국보위를 통한 정권 장악으로 이어졌다고 정리함. 현장 폭력의 실상과 군의 정치 개입을 추가로 밝힌 조사였으며, 헬기사격 문제는 이 조사 범위에 포함되지 않아 뒤이은 별도 조사의 대상이 됨.

미국 법무부가 전두환의 부패 수익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적하여 몰수한 112만 6,951.45달러를 대한민국 정부에 반환함. 가족·관계인을 거쳐 미국 부동산과 투자자산으로 이전된 자금에 대하여 로스앤젤레스와 필라델피아의 민사몰수 절차 및 합의를 거쳐 회수함.

반환 재원에는 아들 전재용이 취득했던 뉴포트비치 주택의 매각대금에서 회수한 자금 등이 포함됨. 미국 현지 반환일은 11월 9일이며, 한국의 관련 보도일과는 하루 차이가 남.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가 광주 진압 당시 계엄군의 헬기사격과 전투기 무장 출격대기 의혹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함. 군 문서, 목격·관계자 진술 및 전일빌딩 탄흔 등을 종합하여 헬기사격이 이루어졌다고 판단하고, 계엄사령부와 현지 지휘부 사이의 관련 작전 지시도 제시함.

특조위는 일부 전투기에 폭탄이 장착되고 비상대기 조치가 내려진 사실을 확인했으나, 이를 광주 폭격을 위한 명령이었다고 확정하지는 못함. 전두환 등이 참여한 5월 25일 회의의 재진압작전 결정과 군 지휘부의 관여를 설명하면서도, 확인된 사실과 추가 규명이 필요한 의혹을 구분한 발표였음.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종합보고서를 발간하여 대통령과 국회에 제출하고 대국민 보고회를 개최함. 조사위는 계엄군의 헬기사격과 광주 외곽 봉쇄 과정의 민간인 집단살해 등을 재확인하고, 북한군 개입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고 밝힘.

보고서는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책임을 다루었으나, 집단발포의 구체적인 명령 주체와 일부 암매장 의혹 등은 충분히 규명하지 못한 과제로 남음.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생전 직접조사도 성사되지 않아, 종합보고서의 발간이 모든 책임 규명과 피해 확인의 완료를 뜻하지는 않았음.

노태우 7건

제9사단장 노태우가 전두환 등과 함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을 준비하고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함. 반란 지휘부가 모인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에서 휘하 병력의 서울 진입을 지시했으며, 제9사단 병력이 이튿날 새벽 중앙청에 진주함.

반란 뒤 노태우는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어 수도 방위의 핵심 지휘권을 맡음. 이 사건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기존 군 수뇌부를 밀어내고 군권을 장악하는 과정의 주요 단계였음.

배경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한 뒤의 권력 공백기에 전두환·노태우 등 하나회 장교들이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체포를 모의함.

전개

9사단장이던 노태우가 병력을 동원해 반란에 가담했고, 최규하 대통령의 원대복귀 명령에도 불응. 사태 직후 수도경비사령관에 올라 신군부 집권의 토대 마련.

1995년 11월 재임 중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드러나 구속됨. 전직 대통령이 부패 혐의로 수감된 헌정 사상 첫 사례로, 이후 12·12 및 5·18 관련 내란·반란 혐의가 병합되어 함께 재판에 회부됨. 군사정권 청산 요구가 사법 처리로 이어진 분기점.

검찰 특별수사본부가 전두환과 노태우를 12·12 군사반란 관련 혐의로 기소함.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강제 연행을 사전에 계획하고 대통령 재가와 관계없이 무력을 사용하려 했다는 수사 결과를 제시함. 다른 가담자들의 처리는 계속 수사하기로 하여, 이날은 두 전직 대통령을 우선 재판에 넘김.

검찰이 전두환·노태우 등 8명을 5·18 관련 내란 혐의로 기소함. 전두환에게 시국수습방안 수립과 실행, 정치인 체포·연금, 비상계엄 확대와 광주 유혈 진압을 주도한 내란수괴·내란목적살인 등의 혐의를 적용함.

전두환은 이미 12·12 군사반란과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된 상태였으며, 이번 추가 기소로 1980년 정권 장악과 광주 진압의 책임까지 재판에서 다루게 됨.

전두환과 노태우가 12·12 군사반란 및 5·18 내란 사건의 첫 공판에서 함께 피고인석에 섬. 전직 대통령 두 명과 신군부 핵심 인사들을 대상으로 군권 장악과 민주화운동 진압의 법적 책임에 관한 심리가 시작됨. 이 날짜는 이미 진행되던 개별 뇌물 사건 공판과 구별되는 반란·내란 사건의 첫 공판일에 해당함.

서울지방법원 형사합의30부가 12·12 군사반란, 5·18 내란 및 비자금 사건의 1심에서 전두환에게 사형을, 노태우에게 징역 22년 6개월을 선고함. 전두환의 반란·내란 수괴 및 뇌물수수 등의 책임을 인정하고 2,259억 5천만 원을 추징하도록 명령함.

검찰이 노태우에게 구형한 무기징역과 법원이 실제 선고한 징역 22년 6개월은 서로 다름. 전두환에게 내려진 사형은 이후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됨.

김영삼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과의 협의를 거쳐 전두환과 노태우를 특별사면·복권함. 두 사람은 대법원 형 확정 약 8개월 뒤 국민대화합을 명분으로 석방되어 군사반란·내란과 비자금 사건의 실형 복역을 끝냄.

전두환에게 부과된 2,205억 원 등 두 사람의 추징금은 사면 대상에서 제외됨. 석방 뒤에도 추징 의무가 남아 검찰의 재산 추적과 환수 집행이 계속됨.

전두환 정부 7건

전두환 정부가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공포하여 구정치인 등의 정치활동을 제한하는 제도를 시행함. 이 법은 후보 출마와 선거 지원·반대 활동, 정당 및 정치적 사회단체 참여를 규제 대상으로 삼고, 대통령에게 금지 해제 권한을 부여했음. 관련 판정과 처분에 대한 행정소송 등 불복 절차도 배제하여 반대 정치세력의 활동을 차단했으며, 신군부가 주도한 정계 재편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한 법률이었음.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의결한 노동조합법 개정법률을 전두환 대통령이 공포함. 개정법은 노조 설립을 사업 또는 사업장 단위로 규정하고, 근로자 30인 이상 또는 해당 사업장 근로자의 5분의 1 이상의 찬성을 설립 요건으로 정함.

직접적인 근로관계가 없는 사람 등의 노조 설립·해산 및 단체교섭 개입을 금지하고, 상급 노동단체에 교섭을 위임할 때에는 행정관청의 승인을 받도록 함. 사업장 간 연대와 외부 지원, 상급단체의 교섭 활동을 제약하는 법적 장치가 강화되면서, 정권 초기 노동계 정화조치에 이어 노조의 조직과 활동에 대한 제도적 통제가 확대됨.

정부가 내무부의 국무회의 보고를 거쳐 1월 5일 24시를 기해 야간 통행금지를 해제함. 휴전선 인접 지역과 일부 해안·도서 지역 등은 제외되었으며, 대부분 지역에서는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외출을 제한하던 제도가 폐지되어 야간 이동과 생활의 자유가 확대됨.

전두환 정부는 국제대회 개최를 앞둔 대외 이미지 개선, 경제활동 활성화와 민심 수습 등을 배경으로 해제를 추진했으며, 앞서 국회에서도 여야의 해제 건의가 이루어졌음. 해방 직후부터 장기간 이어진 일상 통제가 완화되면서 심야 영업·영화 상영과 야간 교통 등 생활환경에 변화가 나타남.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낮은 임금과 생산직 차별에 맞서 노조민주화와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감. 1984년 말 노동조합 정상화 추진위원회를 만든 노동자들은 기존 집행부의 소극적 대응을 비판하며 교섭을 압박했고, 1985년 4월 16일 부평공장을 시작으로 집단행동에 나섬.

경찰과 회사 측의 압박 속에서도 농성을 이어가 4월 25일 기본급 등 16.4% 인상과 복지조건 개선에 합의함. 이후 관련자 8명이 구속되고 해고·징계가 뒤따랐으나, 전두환 정권의 노동운동 통제 아래 대규모 중공업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이 조직과 처우 개선을 요구한 중요한 투쟁.

경찰이 대우어패럴 노조위원장 김준용 등 간부 3명을 구속하자 구로공단 노동자들이 기업의 경계를 넘어 연대파업에 나섬. 6월 24일 시작된 대우어패럴의 항의파업에 가리봉전자·효성물산·선일섬유 등의 노조가 합류했고, 다른 사업장과 학생·종교·민주화운동 단체들의 지지가 이어짐.

음식물 반입 차단과 경찰의 압박 속에서 농성이 계속되었으나, 6월 29일 회사 측의 폭력배 동원과 사복경찰의 진압으로 대우어패럴 농성이 강제해산됨. 약 2,500명이 참여한 투쟁 뒤 43명이 구속되고 다수의 노동자가 해고됨. 전두환 정권기 노동탄압에 맞서 사업장 간 연대와 정치적 요구가 결합된 투쟁.

6월 민주항쟁 이후 노동자들이 민주노조 건설과 임금인상,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전국적인 집단행동에 나섬. 7월 5일 현대엔진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을 출발점으로 울산과 마산·창원의 대공장에 투쟁이 확산되었고, 8월에는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대규모 가두시위와 거제 대우조선의 파업으로 이어짐.

8월 22일 이석규가 경찰의 직격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등 진압 과정의 희생도 발생함. 7~9월에 3,341건의 노동쟁의가 집중되었으며, 전두환 정권기에 억눌렸던 노동자들의 조직과 요구가 분출하면서 민주노조운동의 기반이 크게 확대됨.

거제 옥포에서 노조 인정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던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경찰이 발사한 직격 최루탄에 맞아 사망함. 대우조선 노동자들은 회사의 노조 결성 방해에 맞서 8월 8일부터 파업농성을 벌였고, 9일 노동조합을 결성한 뒤 교섭을 요구해 온 상태. 22일 협상이 결렬된 뒤 옥포관광호텔 인근에서 노동자들과 경찰이 대치하던 중 발생한 희생.

이석규의 죽음은 전국 노동자들의 추모와 항의로 이어짐. 장례 과정에서도 충돌과 지원 인사들의 구속이 뒤따르면서, 전두환 정권 말기 노동쟁의에 대한 경찰의 강경 진압이 다시 쟁점으로 떠오름.

이순자 7건

전두환이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재임 중 국정의 과오와 친인척 비리에 대한 최종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밝힘. 공개한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뜻도 표명한 뒤 이순자와 함께 강원도 인제의 백담사로 떠남.

5·18에 대해서는 비극적 결과에 책임을 느끼고 피해의 상처를 충분히 치유하지 못한 점을 후회한다고 언급함. 다만 유혈 진압의 구체적인 지휘·가해 책임을 인정하지는 않아, 일반적인 국정 책임과 피해자에 대한 유감 표명을 구체적 가해행위에 대한 사죄와 구분할 필요가 있음.

전두환과 이순자가 백담사에서 약 2년 1개월간 머문 뒤 서울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옴. 1988년 대국민 사과성명 직후 시작한 은둔을 마쳤으나, 12·12 군사반란과 5·18 진압에 관한 책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이후 수사와 재판으로 이어짐.

광주고등법원 민사2부가 《전두환 회고록》 손해배상 사건에서 총 7천만 원 배상 및 문제 표현 삭제 없는 출판·배포 금지를 명령함. 전두환 사망 후 배우자 이순자가 그의 소송상 지위를 이어받았고, 출판자인 전재국은 공동 피고로 남음.

항소심은 회고록의 허위 서술에 따른 명예훼손 책임을 인정하고, 시위대 장갑차에 계엄군이 희생되었다는 서술도 허위로 판단함. 형사재판이 사망으로 공소기각된 뒤에도 민사책임에 대한 심리가 이어져 나온 판결임.

서울서부지방법원이 대한민국이 이순자 등을 상대로 낸 연희동 자택 소유권 이전등기 소송을 각하함. 국가는 자택의 소유권을 전두환 명의로 회복시킨 뒤 미납 추징금을 집행하려 했으나, 법원은 전두환 사망으로 추징금 채권이 소멸했고 해당 채무도 상속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함.

서울고등법원 민사6-3부가 연희동 자택의 소유권을 전두환 앞으로 이전해 달라는 국가의 청구에 대하여 1심 각하 판단을 유지함. 전두환 사망으로 추징금 채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 이 소송으로 미납액을 추가 환수하려는 시도를 받아들이지 않음.

대법원 3부가 《전두환 회고록》 제1권 관련 손해배상 및 출판금지 사건에서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함. 소송을 수계한 이순자와 출판자인 전재국에게 5·18 단체 4곳 및 조영대 신부에 대한 총 7천만 원 배상책임을 인정하고, 문제 표현을 삭제하지 않은 출판·배포를 금지함.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허위·모욕적 서술이 조카인 조영대의 추모감정을 침해할 수 있다고 판단함. 전재국의 책임은 출판자로서 저자와 공동으로 부담하는 책임이며, 판결 확정이 실제 배상금 지급 완료를 뜻하지는 않음.

대법원 1부가 국가의 연희동 자택 소유권 이전등기 청구에 대한 상고를 심리불속행 기각하여 원심 각하를 확정함. 이순자 등 명의의 재산을 전두환 앞으로 되돌려 미납 추징금을 집행하려던 소송이, 전두환 사망에 따른 추징금 채권 소멸을 이유로 최종 종결됨.

2026년 4월 보도에서도 전두환의 미납 추징금은 약 867억 원으로 집계됨. 이번 확정으로 해당 소송을 통한 추가 환수는 불가능해졌으나, 모든 장래 입법이나 별개 법적 청구의 가능성까지 판단한 것은 아님.

5·18 민주화운동 6건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대학 휴교에 반발한 학생들이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시작하고, 공수부대의 폭력적인 해산·연행에 항의하는 움직임이 광주 시내로 확산됨. 계엄군의 구타와 강경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이 참여하면서 계엄 해제와 신군부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화운동으로 확대됨.

학생 중심의 시위는 계엄군의 강경진압에 대한 시민들의 항의와 결합하여 대중적 항쟁으로 발전함. 이날 시작된 운동은 광주와 전남 일대에서 열흘 동안 이어졌으며, 27일 무력 진압 뒤에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요구를 통해 한국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기반으로 남음.

광주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대와 대치하던 계엄군이 오후 1시 무렵 시민들을 향해 집단발포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함. 유혈진압이 격화되자 시민들의 무장 저항이 본격화되었으며, 계엄군은 이후 시내 중심부에서 철수하여 광주 외곽을 봉쇄함.

이 발포는 5·18민주화운동의 전개를 바꾼 핵심 사건이자 오랜 진상규명의 대상이었음. 전두환의 신군부 지도자로서의 내란 책임과 별개로, 이날 도청 앞 집단발포의 구체적 명령 경로와 최종 명령자를 특정하는 문제는 2024년 조사위 종합보고서 발표 당시에도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쟁점으로 남음.

계엄군이 상무충정작전을 실행하여 전남도청과 광주 시내의 시민군 거점을 다시 점령함. 공수여단 특공조와 정규군 병력이 투입된 새벽 진압 과정에서 윤상원 등을 비롯한 시민들이 사망하고 다수가 연행되면서 열흘간의 항쟁이 무력으로 종결됨.

대법원은 전두환 등이 저항 세력의 사망을 예상하면서도 재진입작전을 결정·강행한 데 대해 내란목적살인의 공동책임을 인정함. 작전 명령에 작전 수행 범위의 발포를 허용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판단으로, 이는 5월 21일 집단발포의 구체적인 최초 명령자가 누구였는지를 확정한 판단과는 구별됨.

전두환이 경남 합천에서 구속영장 집행으로 연행되어 안양교도소에 수감됨. 검찰 소환을 거부한 이튿날의 구속으로, 당시 영장에는 12·12 군사반란과 관련된 반란수괴·불법진퇴·상관살해 및 미수 등 군형법상 6개 혐의가 적용됨.

12월 21일 군사반란 혐의로 기소된 뒤, 이듬해 1월 뇌물수수와 5·18 내란 혐의가 별도로 추가됨. 따라서 이날의 구속 혐의와 이후 병합 재판에서 다룬 전체 범죄사실은 구분됨.

12월 19일 국회를 통과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법률 제5029호로 공포·시행됨. 12·12와 5·18 전후의 헌정질서 파괴범죄에 관하여 국가 소추권 행사가 제한되었던 기간의 공소시효를 정지된 것으로 규정함.

관련 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하다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사람에게 특별재심을 청구할 길도 마련함. 책임자 처벌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함께 추진할 법적 근거가 보강됨.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12·12 군사반란·5·18 내란 및 비자금 사건 상고심에서 전두환의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 노태우의 징역 17년과 약 2,628억 원 추징을 확정함. 군사반란과 내란으로 집권한 뒤 헌법 개정과 통치를 이어갔더라도 그 폭력적 정권 장악이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다수의견을 제시함.

광주시민의 저항은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로 판단함. 내란의 종료 시점은 항소심이 본 1987년 6·29 선언이 아니라 비상계엄이 해제된 1981년 1월 24일로 보면서도 원심의 형량은 유지함.

신군부 5건

최규하 대통령이 전두환을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함. 전두환은 현역 군인이자 국군보안사령관인 상태에서 국가의 주요 정보기관 수장까지 겸임하여 군 내부의 정보·수사 권한과 중앙정보부의 기능을 함께 행사하게 됨.

12·12 군사반란으로 군 지휘권을 장악한 뒤 국가권력 전반으로 영향력을 넓혀 가던 시기의 인사였음. 민주화 이행을 요구하는 이른바 서울의 봄이 진행되던 가운데 이루어진 이 겸직은,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뒤이은 신군부의 집권으로 연결되는 권력 집중의 한 단계였음.

비상계엄 아래 대통령의 자문·보좌기구를 표방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설치됨. 최규하 대통령이 위원장을, 전두환이 실무 권한을 집중한 상임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으며, 군 인사와 대통령 비서진이 참여한 상임위원회 및 분과위원회가 국정 전반에 관여함.

국보위는 공직자 숙정, 언론 통제와 사회정화 조치 등을 추진하며 신군부의 국정 장악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함. 형식적인 대통령 자문기구와 실제 권력 행사의 차이가 컸으며, 법원은 전두환 등이 국보위를 통해 행정부와 대통령의 기능을 무력화한 사실을 인정함.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으로 있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사회정화를 명분으로 공직자 숙정을 추진함. 서울고법의 1996년 판결은 전두환·허삼수가 계획을 입안하고 각 기관에 사직을 강요하여 7월 말까지 공직자 5,490명과 공공기관 등의 임직원 3,111명, 합계 8,601명을 퇴직시킨 사실을 인정함. 당사자의 자발적 사직 형식을 이용했으나 일부는 의사에 반한 퇴직이었고, 이후 소청 제기자에게 고발·구속을 경고하며 취하를 압박한 행위도 판결에 포함된 내용임.

보안사령부와 국보위가 언론 통제를 위한 인적 정비에 나서 보도검열에 협조하지 않거나 제작거부에 참여한 언론인 등을 해직 대상으로 지목함. 명단이 각 언론사에 전달된 뒤 사직 종용과 자체 해직이 겹치면서 수백 명의 언론인이 직장을 잃었으며, 일부는 재취업 제한이나 연행·가혹행위까지 겪었음. 이 조치는 같은 해 11월 언론사 통폐합에 앞서 편집 현장의 저항을 약화시킨 일련의 언론장악 과정이었음.

1980년 언론통폐합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을 맡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신군부가 노동운동 통제에 나서고, 1980년 8월 21일 노동청을 거쳐 노동조합 정화지침을 전달한 사건. 한국노총과 산별노조 지도부 사퇴, 조직 통폐합과 지역지부 폐지를 추진한 조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록에 따르면 1970년대 민주노조 사업장과 활동가들이 주요 탄압 대상이 되고, 이후 노동자 연행·구속과 일부의 삼청교육대 수용, 1981년 이후 민주노조 강제해산으로 이어진 과정.

하나회 4건

전두환·노태우·정호용 등 육군사관학교 11기 출신 장교들이 친목 인맥을 군내 비밀 사조직 하나회로 확대함. 영남 출신과 육사 선후배 인맥을 중심으로 결속하고, 박정희 정권 아래 군의 주요 보직을 차지하며 세력을 키운 조직.

결성 시점은 자료에 따라 1962년 또는 1963년으로 제시됨.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인맥은 1979년 12·12 군사반란과 이듬해 신군부의 권력 장악에 동원된 핵심 기반.

보안사령관 강창성이 윤필용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군내 사조직 하나회의 존재와 회원들의 인맥이 드러남. 하나회 소속 장교들이 정치적 위기에 놓였으나 조직 전체가 해체되지는 않았으며, 전두환 등 핵심 인물들의 군 경력도 이어짐.

전두환은 이후 대통령 경호 관련 보직과 제1보병사단장을 거쳐 1979년 3월 보안사령관에 오름. 하나회가 박정희 정권 아래 군의 요직에 진출하고 후일 신군부의 기반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은 정치적 위기.

군 내부 사조직 하나회에 속한 전두환·노태우와 이들을 지지한 장교들이 수도권 병력과 주요 부대를 동원해 12·12 군사반란의 중심을 이룸. 보안사령부, 수도경비사령부, 공수부대 등에서 형성된 인맥은 정규 지휘체계의 명령을 거스른 병력 운용을 가능하게 한 조직적 기반이었음.

반란 뒤 신군부 인사들이 군의 핵심 보직을 차지하면서 기존 지휘부가 교체됨. 하나회는 신군부의 중요한 인적 토대였지만 두 집단의 범위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며, 반란에는 하나회 회원 외의 지지 세력도 참여함.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와 군 병력의 위력을 이용해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관철함. 조치는 5월 17일 24시, 곧 18일 0시부터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에 적용되었으며, 정치활동 금지·대학 휴교·언론 검열 강화와 정치인·재야인사·학생들의 대규모 연행이 뒤따름.

계엄군은 국회의사당을 점거하여 예정된 임시국회 개회를 막았고,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군사력으로 억압함. 대법원은 국헌문란 목적 아래 이루어진 계엄 확대와 일련의 강압을 내란행위로 판단하였으며, 이 조치에 항의한 광주시민의 시위는 헌정질서를 지키려는 정당한 행위로 인정함.

12·12 군사반란 4건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노태우 제9사단장 등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대통령의 사전 재가 없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강제로 연행함. 서울과 수도권 병력을 동원한 반란은 이튿날 새벽까지 이어졌으며, 육군본부·국방부 점령과 반대 지휘관 체포를 거쳐 군 지휘권 장악으로 귀결됨.

최규하 대통령의 사후 재가는 이미 진행된 무력행사를 정당화하지 못했으며, 대법원은 이 사건을 대통령의 군통수권과 육군참모총장의 지휘권에 반항한 군사반란으로 판단함. 최규하 정부가 곧바로 폐지된 것은 아니지만, 신군부가 이듬해 국가권력 전반을 장악하는 기반이 된 사건이었음.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노태우 제9사단장이 12월 7일 무렵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연행 문제를 논의하고 실행일을 12월 12일로 정함. 전두환은 이어 이학봉·허삼수·우경윤 등에게 체포 장소와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마련하도록 지시함.

군 수뇌부를 제거하고 지휘권을 확보하려는 준비는 병력 동원 지휘부의 구성으로 이어짐. 정승화의 10·26 사건 관련 혐의 수사는 표면적 명분이었으며, 법원은 이 계획과 실행을 군 지휘권 장악을 위한 반란의 일부로 인정함.

전두환이 연희동 자택 앞에서 검찰의 12·12 및 5·18 재수사가 정치적 필요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며 소환과 수사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함. 이른바 골목성명을 낭독한 뒤 고향 경남 합천으로 내려감.

검찰은 같은 날 밤 군형법상 반란수괴 등 혐의의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받아 수사관들을 합천으로 보냄. 이튿날 전두환이 연행되면서 수사 거부는 구속 수사로 이어짐.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가 전두환의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노태우의 징역 22년 6개월을 징역 17년으로 감형함. 반란·내란과 뇌물수수의 유죄 판단을 유지하면서 전두환에게 2,205억 원, 노태우에게 약 2,628억 원의 추징을 명령함.

재판부는 군사반란과 내란에 의한 권력 장악의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6·29 선언과 정권 이양 등을 양형에 참작함. 이듬해 대법원에서 두 사람의 형량과 추징액이 확정됨.

민주정의당 4건

민주정의당이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창당대회를 열고 현직 대통령 전두환을 초대 총재와 제12대 대통령 후보로 추대함. 신군부 출신 인사들이 창당을 주도하고 민간 정치인들이 참여했으며, 이재형이 당대표위원을 맡은 집권정당의 출범.

당은 민주·정의·복지 등을 내세웠지만 계엄과 정치활동 규제 속에서 조직되었음. 이후 대통령 간접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전두환 체제를 뒷받침하는 제5공화국의 여당이 됨.

새 헌법에 따라 구성된 대통령선거인단이 민주정의당 후보 전두환을 제12대 대통령으로 선출함. 선거인단 5,271명 가운데 4,755명의 지지를 얻은 간접선거로, 유권자가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방식은 채택되지 않았음.

1980년 헌법이 정한 7년 단임 대통령제에 따라 전두환은 3월 3일 취임함. 군사력으로 확보한 실권이 새로운 헌법과 집권정당, 간접선거를 통해 제도화된 과정.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 민주정의당이 148석을 확보한 가운데, 선거 직전 창당한 신한민주당이 67석을 얻어 민주한국당을 제치고 제1야당이 됨. 김영삼·김대중 세력이 뒷받침한 신민당의 약진은 전두환 집권 중반의 정치 구도를 흔들었으며,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국회와 거리에서 확대할 기반이 되었음. 민정당은 과반 의석을 유지했지만 야권의 중심이 신민당으로 옮겨 가면서 직선제 개헌을 둘러싼 대립이 강화됨.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가 총재를 맡고 전두환은 명예총재로 물러남. 6월항쟁과 6·29선언 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던 시기에 집권당의 당권을 대통령 후보에게 넘긴 조치.

전두환의 대통령 임기는 계속되었으며, 노태우는 당을 이끌고 같은 해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함. 대통령 직선제 선거를 준비하며 후계자의 당내 지위를 강화한 권력 재편.

삼청교육대 3건

계엄사령부가 계엄포고 제13호를 발표하고, 국보위의 삼청계획에 따라 군·경이 검거한 사람들을 군부대의 삼청교육대에 수용함. 이 계획은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의 재가를 거쳤으며, 전체 검거자는 6만 755명, 그중 군부대에서 순화교육을 받은 사람은 3만 9,742명으로 집계됨. 수용자들은 영장과 법원의 재판 없이 구금되어 구타·가혹행위와 강제노역을 겪었고, 국방부가 1988년 보고한 교육 관련 사망자는 54명이었음.

대법원이 삼청교육 근로봉사대를 이탈했다가 처벌된 피해자의 재심 사건에서 계엄포고 제13호가 위헌·위법하여 무효라고 판단함. 법원은 발령 요건의 미충족뿐 아니라 신체와 거주·이전의 자유 침해, 영장주의 및 죄형법정주의 위반을 지적하고 검사의 재항고를 기각함. 이는 1980년 삼청교육의 법적 근거 자체에 대한 사법 판단으로, 피해자의 재심을 인정한 결정이며 전두환 개인에 대한 새로운 형사 유죄판결은 아니었음.

진실화해위원회가 삼청교육 피해 사건 41건에 대해 진실규명을 결정함. 위원회는 군부대 수용과 강제노역, 가혹행위뿐 아니라 계엄 해제 이후 사회보호법에 의한 보호감호 및 퇴소 후 지속된 감시와 낙인도 피해의 범위에 포함했음. 국가의 사과와 피해회복, 관련 판결의 재심 및 피해자법 개정을 권고한 결정으로, 눈에 보이는 상해나 사망 외의 불법 구금과 장기적 사회적 피해까지 국가책임을 인정한 조치였음.

대학생 강제징집 및 녹화사업 3건

전두환 대통령이 주영복 국방부장관에게 시위 관련 학생들을 전방부대에 입영시키도록 구두 지시함.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6년 조사에서 보안사 문건을 근거로 이 지시와 병무청으로 이어진 전달 경로를 확인했다고 발표함. 강제징집은 경찰의 연행, 대학의 제적·휴학 처리, 병무행정이 연계된 방식으로 시행되어 학생들을 사회에서 격리했으며, 법정 입영 절차나 신체·연령 요건을 무시한 사례도 확인된 인권침해였음.

보안사령부가 전담 심사과를 두고 학생운동 전력자 등의 사상을 바꾸고 학내 정보를 수집하게 하는 녹화사업을 본격화함. 강제징집된 학생뿐 아니라 정상 입대자 등도 대상이 되었으며, 감금·폭행·협박으로 동료와 선후배의 활동을 보고하도록 강요받았음.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6년 1,192명의 녹화사업 대상자를 추정하고 전두환이 서명한 1983년 12월 문서에 사업 실적이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했으며, 이는 군사안보를 이유로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 국가폭력의 사례임.

진실화해위원회가 대학생 강제징집 및 프락치 강요 공작 사건의 신청인 187명에 대해 진실규명을 결정함. 위원회는 국가기관과 대학이 연계하여 학생들을 강제로 군에 보내고, 폭력과 협박으로 사상전향 및 동료 사찰을 강요한 행위를 중대한 인권침해로 판단함. 이튿날 발표에서는 장기간의 녹화·선도공작 관련자 2,921명의 명단을 확인했다고 밝혔으며, 국가사과와 실질적 피해회복 및 장기 조사체계 마련을 권고함.

6월 민주항쟁 3건

전두환 대통령이 특별담화에서 임기 안의 개헌 논의를 중단하고 기존 제5공화국 헌법에 따른 간접선거로 후임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함. 서울올림픽 준비와 정부 이양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야당과 시민사회가 요구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거부한 조치였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분노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각계의 호헌 반대 움직임을 촉발하여 6월 민주항쟁의 주요 배경이 되었음.

1985년 2·12 총선 이후 직선제 개헌 요구가 커지자 여야는 국회 개헌특위를 두고 협상했으나 난항을 거듭함. 전두환은 이를 빌미로 4월 13일 개헌 논의를 빙자한 분열과 혼란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며 임기 중 개헌 유보와 현행 헌법에 의한 정부 이양을 선언함. 직선제를 바라던 국민의 열망에 정면으로 배치된 조치로, 대학교수·종교계·법조계의 잇따른 시국선언과 단식·농성을 촉발함.

6월 민주항쟁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6·10국민대회를 앞두고 열린 시위에서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쓰러짐. 중태에 빠진 이한열의 모습은 시위 진압의 폭력성을 드러내며 학생과 시민의 분노를 확대했고, 다음 날 시작되는 전국적 항쟁에 큰 영향을 주었음. 이한열은 7월 5일 사망했으며, 7월 9일 장례에는 대규모 추모 인파가 모여 민주화 요구와 국가폭력에 대한 항의를 이어갔음.

6월 민주항쟁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조작·은폐를 규탄하고 호헌 철폐를 요구하는 국민대회를 개최한 사건.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 주변이 경찰에 봉쇄된 가운데 오후 6시 차량 경적과 흰 손수건 흔들기 등으로 시민들이 동참하고 시위가 전국 주요 도시로 확산된 전환점.

같은 날 집권 민주정의당이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면서 간선제에 따른 정권 승계와 국민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가 맞선 상황. 명동성당 농성과 연이은 거리 시위, 6·26 국민평화대행진으로 이어지며 개헌 협상을 이끌어 낸 6월 민주항쟁의 본격적 시작.

대한민국 헌법 6월 민주항쟁
6·29선언 3건

전국적인 6월 민주항쟁 속에서 민주정의당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가 시국수습 특별선언을 발표한 사건. 여야 합의에 따른 대통령 직선제 개헌, 선거법 개정, 김대중의 사면복권과 시국사범 석방, 기본권과 언론 자유의 확대 등을 제시한 8개 항의 선언.

직선제 요구를 거부하던 집권세력이 입장을 바꾼 정치적 전환. 7월 1일 전두환의 공개 수용과 여야 개헌 협상을 거쳐 제9차 개정헌법, 12월 대통령 직접선거로 이어진 제도 변화의 계기. 선언 발표 자체와 이후 헌법의 국민투표 확정·공포는 서로 구별되는 단계.

대한민국 헌법 6월 민주항쟁

전두환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통해 노태우가 제시한 6·29선언을 전면 수용한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힘. 이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선거 추진이 정부의 공식 방침으로 자리 잡았음. 국민의 직선제 요구를 거부한 4·13 호헌조치에서 선회한 조치이며, 거리의 항쟁이 이끌어 낸 정치적 양보를 여야의 개헌 협상과 제도 변경으로 연결하는 과정이었음.

국회가 의결한 제9차 헌법개정안을 국민투표로 확정한 사건. 투표율 78.2%, 투표자 기준 찬성률 93.1%로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 등을 담은 개정안을 승인한 결과.

유신헌법 이후 사라졌던 대통령 직접선거를 되살리고 기본권 보장과 권력 통제를 강화하는 변화에 국민이 직접 동의한 절차. 국민투표는 10월 27일, 헌법 공포는 10월 29일, 본격 시행은 1988년 2월 25일로 구분되는 제9차 개헌의 연혁.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 3건

검찰 특별수사본부가 전두환의 대통령 재임 중 자금 조성 규모를 비자금 약 7천억 원과 재단 기금·성금 약 2,515억 원을 합친 9,500여억 원으로 발표함. 같은 날 증거로 확인했다고 밝힌 뇌물은 기업 대표 42명으로부터 받은 2,159억 5천만 원이며, 전두환을 수뢰 혐의로 추가 기소함.

9,500여억 원은 검찰이 파악한 총 조성 규모로, 전액이 같은 범위의 뇌물로 기소되거나 추징 확정된 것은 아님. 전두환에 대한 추징액은 1심에서 2,259억 5천만 원, 항소심에서 2,205억 원으로 정해진 뒤 1997년 대법원에서 확정됨.

전두환이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의 재산명시 심리에 출석하여 자신의 예금으로 29만 1천 원가량을 제시함. 거액의 추징금을 내지 않은 가운데 재산과 생활비 출처를 둘러싼 법원의 추궁이 이어지며 이른바 전 재산 29만 원 논란이 확산됨. 이 수치는 신고한 금융자산의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일가 전체 재산이 그 금액이라는 객관적 확인은 아님.

교보자산신탁이 한국자산관리공사를 상대로 낸 공매대금 배분 취소 소송에서 패소한 뒤 상고하지 않아, 전두환 일가 관련 오산 땅 매각대금 약 55억 원의 국고 환수가 확정됨. 2013년 압류와 이후 공매에서 비롯된 법적 다툼이 마무리됨.

2024년 1월 보도에서는 이 금액을 포함해도 전두환의 미납 추징금이 약 867억 원 남는다고 집계함. 확정일은 2023년 12월 30일이며, 보도일이나 실제 국고 입금일과는 구분됨.

전두환 회고록 3건

전두환이 회고록을 출간하고 5·18 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과 계엄군 헬기 사격 부인 등을 서술함.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조비오 신부도 비난하여 5·18 단체와 유족의 반발을 부름.

이후 출판·배포금지 가처분과 손해배상 소송, 사자명예훼손 형사재판이 진행됨. 후속 법원 판단에서 회고록의 여러 표현이 허위사실 적시와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인정됨.

광주지방법원 민사21부가 5·18 단체와 조비오 신부 유족의 신청을 받아들여 《전두환 회고록》 제1권의 출판·배포금지 가처분을 인용함. 북한군 개입 주장과 헬기 사격 부인 등 문제 된 33곳을 삭제하지 않은 상태의 출판·판매·배포 등을 금지함. 회고록 전체를 무조건 금지한 것이 아니라 지정된 표현을 삭제하지 않은 출판물의 유통을 제한함.

전두환이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향년 90세로 사망함. 회고록 사자명예훼손 사건의 항소심과 거액의 추징금 환수 문제가 남아 있었으며, 정부는 국가장을 치르지 않기로 하고 유족은 가족장을 진행함.

1988년 대국민 사과와 이후 일부 책임·유감 표명은 있었으나, 5·18 진압 지휘의 구체적 책임은 계속 부인함. 사망에 따라 형사재판은 종결 절차에 들어갔고, 회고록 민사소송과 생전 집행된 재산을 둘러싼 다툼은 이후에도 이어짐.

조비오 3건

광주지검이 회고록에서 고 조비오 신부의 헬기 사격 목격 증언을 거짓으로 몰아 비난한 전두환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함. 5·18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 여부와 전두환이 서술의 허위성을 인식했는지가 형사재판의 주요 쟁점으로 다루어짐.

광주지방법원이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전두환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함. 군 기록과 증언 등을 바탕으로 5·18 당시 헬기 사격을 인정하고, 목격 증언을 부인하며 고인의 명예를 훼손한 책임을 인정함.

검찰과 전두환 양측이 모두 항소함. 항소심 중 전두환이 사망하여 공소가 기각되었으므로, 이 1심 형은 확정되지 않음.

광주지방법원 형사1부가 전두환의 사망을 확인하고 사자명예훼손 항소심의 공소를 기각함. 형사소송법상 피고인 사망 규정에 따른 절차적 종결로, 항소심에서 범죄사실을 심리하여 무죄를 선고한 것은 아님.

전두환은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나, 양측 항소로 형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음. 회고록 관련 민사소송은 상속인의 소송 수계 절차를 통해 별도로 계속됨.

장태완 2건

장태완이 준장 계급으로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에 부임함. 훗날 12·12 군사반란 때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저항하게 되는 장태완이 수도권 방위 부대에서 지휘 경력을 쌓은 시기.

장태완의 행적을 다룬 보도에 따르면 이 무렵 그가 방공포대대장 김상구를 징계한 일이 전두환 측과의 갈등으로 이어졌음. 김상구는 하나회 회원이자 전두환의 동서였으며, 장태완은 이후에도 하나회 중심의 군 인맥과 갈등을 겪은 인물.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강제 연행에 맞서 정규 지휘계통의 병력을 모아 반란 진압을 시도했으나 지휘부의 분열과 병력 이탈로 실패함. 12월 13일 새벽 신윤희가 지휘하는 헌병들이 수도경비사령부를 장악하고 장태완과 그곳에 모여 있던 육군 지휘부를 체포·무장해제함.

서울고등법원이 인정한 체포 시각은 새벽 3시 40분 무렵이었으며, 체포 과정에서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이 총상을 입음. 장태완의 제압과 노태우의 후임 사령관 임명은 반란 세력이 수도 방위 지휘체계를 장악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음.

1980년 언론통폐합 2건

문화공보부가 사회정화 방침에 따라 정기간행물 172종의 등록을 취소하여 발행을 중단시킴. 문학·사회비평 매체였던 『창작과비평』 등을 포함한 대규모 폐간 조치로, 신군부는 사회불안 조성과 계급의식 조장 등을 그 명분으로 내세웠음. 비판적 담론이 유통되던 출판 공간을 행정권으로 축소한 조치이며, 언론인 강제해직과 언론사 통폐합으로 이어진 1980년 언론 탄압의 한 단계였음.

전두환 정부가 국가보위입법회의를 거쳐 제정한 「언론기본법」을 공포함. 이 법은 신문·통신·방송 관련 법체계를 통합하고 언론의 공적 책임을 내세웠으나, 정부가 정기간행물 등록을 취소하거나 발행을 정지할 수 있는 근거도 마련했음. 앞서 이루어진 언론인 강제해직과 언론사 통폐합에 법적 통제 장치가 결합하면서 제5공화국 언론 통제체제가 굳어졌으며, 법률은 민주화 이후인 1987년 폐지됨.

1980년 언론통폐합 보도지침 사건
대한민국 헌법 2건

신군부의 권력 장악 이후 10월 22일 국민투표로 확정된 제8차 개정헌법의 공포·시행.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를 유지하면서 대통령의 임기를 7년 단임으로 정한 제5공화국의 제도적 토대.

행복추구권과 환경권 등 기본권 조항을 정비하고 유신헌법의 일부 권력집중 장치를 수정했으나, 대통령의 비상조치권과 국회해산권을 유지한 체제. 민주화 요구가 계엄과 탄압으로 억눌린 가운데 이루어진 개헌이라는 한계.

부칙에 따라 기존 국회의원들의 임기를 종료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와 정당을 해산한 정치질서 재편. 새 국회가 구성될 때까지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입법권을 대행하고 그 입법·처분에 대한 제소를 제한하여 신군부의 체제 정비를 뒷받침한 조치.

6월 민주항쟁과 6·29 선언 이후 여야 협상, 10월 12일 국회 의결과 10월 27일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제9차 개정헌법의 공포.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를 채택하고 대통령의 국회해산권과 비상조치권을 없앤 권력구조 개편.

국군의 정치적 중립을 명시하고 국정감사권을 부활시키는 한편, 적법절차와 체포·구속 시 고지, 범죄피해자 구조 등 기본권 보장을 강화한 변화. 전문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4·19 민주이념의 계승을 명시.

제111조에 헌법재판소와 위헌법률·탄핵·정당해산·권한쟁의·헌법소원 심판을 규정하여 헌법을 통한 권력 통제의 기반을 마련한 개편. 부칙에 따라 1988년 2월 25일부터 시행하되 새 헌법에 따른 최초 대통령 선거와 시행 준비를 미리 가능하게 한 이행 규정.

대한민국 2건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가 임시총회를 열어 신문·방송사의 통폐합과 새로운 통신사 설립을 결의함. 표면상 언론계의 자율 정화였으나 보안사령부가 언론사주들에게 경영권 포기 등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조치였음. 동양방송과 동아방송 등이 한국방송공사에 흡수되고 지역신문과 통신사가 재편되면서 언론의 소유·경영 구조가 축소되었으며, 전두환 정권에 대한 비판과 경쟁적 보도를 억제할 기반이 강화되었음.

1980년 언론통폐합

김영삼이 5월 18일부터 이어 온 민주화 요구 단식투쟁을 23일 만에 중단함. 가택연금 상태에서 구속자 석방과 정치활동 규제 해제, 언론 자유, 대통령 직선제 등을 요구하며 시작한 단식은 건강 악화 속에서도 계속되었음. 김영삼은 투쟁을 지속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단식을 끝냈고,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에 맞선 재야·야당 및 국내외 민주화세력의 연대를 촉진한 계기가 되었음.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 2건

1983년 10월 9일 버마 랭군(현 미얀마 양곤)의 아웅산 묘소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참배를 앞두고 폭탄이 폭발. 한국 측 수행원과 취재진 17명, 현지인 4명 등 총 21명이 사망. 전두환은 폭발 당시 묘소에 도착하기 전이어서 피해를 피함. 사건 뒤 버마 당국의 수사로 북한 공작원의 범행이 확인됨.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가 발생하자 전두환 대통령이 예정돼 있던 나머지 해외 순방을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옴. 귀국 후 정부는 비상국무회의를 열고 경계 태세를 강화했으며, 북한에 대한 대응을 둘러싼 논의가 이어짐. 해외에서 발생한 테러가 국내의 안보·정치적 대응으로 번진 전환점.

형제복지원 사건 2건

부산지검 울산지청의 수사와 언론 보도를 통해 형제복지원의 강제수용·강제노역과 폭행, 다수 사망 실태가 드러남. 울주 작업장에서의 노역과 감금에 대한 조사가 시설 운영 전반의 문제로 확대되었고, 야당과 사회단체의 실태조사 요구로 이어짐.

드러난 수용 생활

아동과 성인, 여성과 장애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수용되어 있었으며, 가족과의 연락과 이동을 제한받음. 수용자들은 폭력과 노동력 착취뿐 아니라 교육 기회의 상실도 겪었음.

수사 이후의 생활

사건이 공개된 뒤 다수 수용자가 퇴소하거나 다른 시설로 옮겨졌지만 시설과 재단은 이름을 바꾸어 이어짐. 퇴소만으로 가족관계와 생계, 심리적 후유증이 회복된 것은 아니었으며, 생존자들은 이후에도 수용 경력에 따른 낙인과 어려움을 증언함.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화해위원회가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에 따른 중대한 인권침해라고 결정하고 이튿날 조사 결과를 발표함. 경찰 등 공권력이 사람들을 시설에 넘긴 과정과 강제노역·가혹행위, 국가의 관리·감독 방기가 함께 지적되었으며, 당시 조사에서 확인된 수용 중 사망자는 657명이었음. 박정희·전두환 정부 시기에 이어진 수용정책의 책임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국가사과와 피해회복을 권고한 결정임.

조사 결과와 권고

첫 진실규명 결정은 신청인 191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졌으며, 위원회는 국가의 공식 사과와 피해회복, 트라우마 치유 지원을 권고함. 2022년 조사에서 확인한 수용 중 사망자는 657명이었음.

공권력의 관여

경찰과 행정기관의 인계, 시설 내 강제노역과 폭력, 관리·감독 방기를 함께 조사함. 개별 운영자의 행위뿐 아니라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가 결합한 인권침해라는 판단.

형제복지원 사건
전두환 추징법 2건

국회가 이른바 전두환 추징법으로 불린 공무원범죄에 관한 몰수 특례법 개정안을 통과시킴. 불법재산임을 알면서 넘겨받은 제3자의 재산에도 추징을 집행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 추징 시효를 종전 3년에서 10년으로 늘림.

개정법은 7월 12일 공포·시행됨. 전두환 일가 명의로 분산된 재산의 환수 수사에 활용되었으며, 불법재산을 취득한 정황에 대한 인식 등이 제3자 추징의 요건으로 적용됨.

대법원이 전두환 일가 관련 압류처분무효확인 사건에서 공무원범죄몰수법상 제3자에 대한 추징도 범인에 대한 추징 집행을 전제로 한다고 판단함. 범인이 사망한 경우 별도 법률상 근거가 없다면 본인과 제3자에 대한 추징 집행을 계속할 수 없다는 법리를 밝힘.

생전 이루어진 개별 압류처분의 적법성에 대한 다툼은 심리하면서도, 사망 후 추징을 계속 집행할 근거는 없다고 봄. 이후 재산 환수 소송에서 사망 시점과 집행 단계의 구분이 중요해짐.

전재국 2건

서울중앙지검 미납추징금 환수팀이 전두환의 연희동 자택에서 재산 압류 절차를 진행하고, 장남 전재국의 출판사 시공사 등 17곳을 압수수색함. 고가 미술품과 회계자료 등을 확보하여 소유 관계와 자금 흐름을 조사함. 당시 추징금 중 1,600억 원 이상이 미납된 상태였으며, 압수물의 실제 소유 여부에 대한 확인도 함께 진행됨.

장남 전재국이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가족을 대표하여 대국민 사죄문을 발표하고, 당시 남은 전두환 추징금 1,672억 원을 자진 납부하겠다는 계획을 제출함. 일가의 부동산과 미술품 등을 통해 환수 절차에 협조하겠다고 약속함.

발표 내용은 향후 재산 처분과 환수 협력을 포함한 이행 계획으로, 당일 전액 납부가 완료된 것은 아님. 이후에도 재산의 환수 범위와 공매대금 배분 등을 둘러싼 소송이 이어졌으며 미납액이 남음.

5·16 군사정변 1건

5·16 군사정변 이틀 뒤 장면 내각이 총사퇴를 결의함. 같은 날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군사정변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벌여 군사정부를 지지하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냄.

전두환 대위는 생도들의 지지 행진을 주도한 인물로 알려졌으며,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비서관 등으로 기용됨. 군사정변에 대한 생도 동원과 전두환의 정치군인으로서의 경력 형성이 연결된 국면.

박정희 1건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이 육군회관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고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의 수사 결과를 발표함. 김재규와 관련 피의자들의 행적 및 범행 경위를 설명한 당시 수사기관의 공식 발표였음.

박정희 사망 뒤 중앙정보부와 대통령 경호실이 약화된 가운데, 사건 수사를 맡은 전두환과 보안사령부의 영향력이 커지는 계기가 됨. 발표 내용은 합동수사본부의 당시 판단으로 구분해야 하며, 수사기관이 제시한 범행 동기를 곧바로 확정된 역사적 사실과 동일시할 수 없음.

최규하 1건

최규하 대통령이 특별성명을 발표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남. 12·12 군사반란으로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광주 진압,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운영을 거치며 국가권력을 장악한 상황에서 나온 사임.

국무총리 서리 박충훈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으며,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전두환을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함. 현직 대통령의 사임과 신군부 지도자의 대통령 취임이 이어진 권력 이양 과정.

통일주체국민회의 1건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단독 입후보한 전두환을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함. 최규하가 사임한 뒤 실시된 유신헌법상의 간접선거로, 투표에 참여한 대의원 2,525명 가운데 2,524명이 찬성한 선거.

전두환은 이미 군사반란과 비상계엄 확대를 통해 실권을 장악한 상태였으며, 이번 선거로 대통령의 공식 지위까지 확보함. 대통령 취임식은 9월 1일 별도로 거행됨.

김대중 (전 대통령) 1건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가 야당 지도자 김대중에게 내란음모와 국가보안법·반공법·계엄법 위반 등의 혐의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함.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함께 김대중과 재야 인사들을 연행하고 민주화운동을 내란음모로 구성하였으며, 수사 과정에서는 고문과 사건 조작이 이루어졌음. 이 사형판결은 1981년 상고심에서 확정된 뒤 감형되었고, 내란음모·계엄법 위반 부분은 2004년 재심에서 무죄 판단을 받은 사건임.

대한민국 제5공화국 1건

전두환 정권이 마련한 헌법개정안이 1980년 10월 22일 국민투표에서 찬성 다수로 확정됨. 대통령 7년 단임과 대통령선거인단을 통한 간접선거 등을 규정한 헌법으로, 같은 달 27일 공포되어 제5공화국의 헌정적 틀이 됨. 5·18 민주화운동 진압과 정치적 자유의 제약이 이어진 상황에서 진행되어 국민투표의 정치적 정당성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뒤따름.

10·27 법난 1건

1980년 10월 27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가 불교계 정화를 명분으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송월주 등 불교계 인사 153명을 강제연행함. 10월 30일에는 군인과 경찰을 대규모 투입해 전국 사찰과 암자를 수색하는 등 탄압이 확대됨.

신군부가 불교계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지도부를 압박했으며 조사 중 폭행과 고문 등 인권침해가 발생함. 이후 국가권력에 의한 종교 탄압으로 규명되었으며, 불교계 피해 회복과 역사적 책임을 둘러싼 논의가 이어짐.

SK그룹 1건

전두환 정부의 동력자원부가 대한석유공사 민영화에 따른 지분 인수기업으로 선경을 선정했다고 발표함. 미국 걸프사의 철수에 뒤이은 조치로, 선경은 같은 해 12월 지분 50%와 경영권을 인수해 섬유 중심 기업에서 석유·화학 분야로 사업을 확대함.

정부는 산유국과의 관계를 통한 원유 확보 능력과 자금 조달 등을 선정 이유로 제시함. 선경의 유공 인수는 그룹의 석유·화학사업 확대와 수직계열화의 토대가 되었으며, 11월의 선정 발표에 이어 12월 인수와 경영진 교체가 이루어짐.

김지하 1건

시인 김지하가 형집행정지로 석방됨.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감됐다가 1975년 잠시 풀려난 뒤, 인혁당 사건의 고문·조작을 폭로하고 다시 구속되어 장기간 옥살이를 한 끝의 출감.

전두환 정부 출범 뒤 이루어진 석방이지만, 이전 정권에서 시작된 국가폭력과 장기 구금의 피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음. 김지하는 출감 이후에도 집필과 사상적 모색을 이어감.

김대중 내란 음모 조작 사건 1건

대법원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사형판결을 확정한 날, 전두환 정부는 국무회의를 거쳐 김대중의 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함. 국내외에서 사형집행 반대와 구명 요구가 이어진 상황에서 이루어진 조치였으나, 정치적 수사와 재판의 유죄판결 자체가 이때 바로잡힌 것은 아니었음. 김대중은 이후에도 수감되다가 19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미국으로 출국하게 되었음.

1988 서울 올림픽 1건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가 서울을 1988년 제24회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함. 서울은 52표를 얻어 27표의 일본 나고야를 앞섰으며, 이후 경기장·교통시설과 대회 운영을 준비하는 국가적 사업이 본격화됨.

유치 추진은 1979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서울시와 대한올림픽위원회, 정부 및 민간 인사들의 외교·유치 활동이 함께 이루어진 결과였음. 전두환 정부는 유치 재추진을 지원하고 대통령 명의의 지원 확약 서신을 제출했으며, 국제대회를 대외 이미지 개선과 정권 안정의 기회로 활용하려는 정치적 목적도 갖고 있었음.

김영삼 1건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김영삼이 5·18민주화운동 3주년에 맞춰 민주화 조치를 요구하는 무기한 단식에 들어감. 김영삼은 정치활동 규제 해제, 구속자 석방, 해직자·제적학생의 복귀, 언론 자유,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요구했으며, 단식은 6월 9일까지 23일 동안 이어졌음. 이 투쟁은 재야와 야당, 국내와 해외 민주화세력의 연대를 촉진했고, 이듬해 김영삼·김대중 세력의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음.

민주화추진협의회 1건

전두환 정권 아래 정치활동에 제약을 받던 김영삼·김대중 진영이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함. 두 사람을 공동의장으로 추대하되 미국에 있던 김대중을 대신해 김상현이 공동의장 대행을 맡았으며,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제도정치 진출을 함께 추진했음. 민추협은 이듬해 신한민주당 창당의 기반이 되어 전두환 정권에 맞서는 야당세력의 재결집을 이끈 조직이었음.

김근태 고문 사건 1건

경찰이 1985년 9월 4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전 의장 김근태를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해 전기고문과 물고문 등 가혹행위를 가함. 김근태는 9월 26일 검찰로 송치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19일 첫 공판에서 고문 경위와 후유증을 공개 진술하고 법원에 조사를 요구함.

가족과 민주화운동 관계자들은 김근태의 소재와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수사기관을 찾아다녔고, 고문 피해는 인재근 등을 통해 국내외 언론과 인권단체에 알려짐. 이후 이근안 등 수사관들에 대한 형사절차와 국가배상소송, 김근태 본인의 재심으로 이어짐. 전두환 정권 시기 수사기관의 고문과 용공조작을 공론화한 대표적인 인권침해 사례.

김근태는 대공분실 조사 과정에서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반복적으로 당했으며, 이후 법정에서 고문 사실을 직접 진술함. 남영동 고문실태 조사 자료에도 1985년 9월 4일 연행과 9월 26일 검찰 송치, 전기·물고문 피해 및 이후 재판 과정이 기록돼 있음.

가족과 민주화운동 관계자들은 김근태의 소재와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수사기관을 찾아다녔고, 고문 피해 사실은 인재근 등을 통해 국내외 언론과 인권단체에 알려짐. 이후 이 사건은 수사관들에 대한 형사절차, 국가배상소송, 김근태 본인의 재심으로 이어짐.

김근태 이근안 고문 가해자
남북 이산가족 상봉 1건

남북 적십자 합의에 따른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 기간 중 서울과 평양에서 첫 공식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짐. 전체 방문 일정은 9월 20일부터 23일까지였으며, 실제 가족을 만난 방문자는 남측 35명과 북측 30명이었음.

1984년 북한 수해 구호물자 수용을 계기로 재개된 남북대화와 적십자 협상을 거쳐 성사됨. 양측 예술공연단의 공연도 진행되었으며, 가족들의 만남은 서울과 평양의 지정된 장소와 짧은 일정에 한정됨.

신한민주당 1건

신한민주당과 민주화추진협의회가 2·12총선 1주년을 맞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1천만 서명운동을 시작함. 전두환이 개헌 논의를 서울올림픽 이후로 미루려 하자 야권은 지역별 집회와 서명으로 대응했고, 교수·종교계의 공개 요구도 확산되었음. 전두환은 4월 30일 여야가 합의한 개헌안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대통령 직선제와 내각제를 둘러싼 대립은 해소되지 않은 상태였음.

부천서 성고문 사건 1건

부천경찰서 문귀동 경장이 노동 현장에 위장취업한 혐의로 연행된 권인숙에게 6월 6일과 7일 성고문을 가함. 권인숙이 피해를 공개하고 고소하자 변호인과 여성·종교·민주화단체들이 진상규명을 요구했으나, 당시 검찰은 가해자를 기소유예하고 피해자의 문제 제기를 왜곡했음. 6월항쟁 뒤 재수사가 진행되어 문귀동에게 징역형이 선고된 사건으로, 공권력에 의한 성폭력과 수사기관의 은폐를 규탄하는 연대를 확대한 계기였음.

보도지침 사건 1건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발간한 《말》 특별호가 한국일보 기자 김주언이 제공한 보도지침 584건을 공개함. 자료는 1985년 10월부터 1986년 8월까지 문화공보부가 언론사에 전달한 보도 관련 지시였음. 김주언·김태홍·신홍범 등이 구속·기소되었으나 1995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됨.

1980년 언론통폐합 민주언론시민연합 보도지침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경찰들이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을 불법연행한 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추궁하며 물고문을 가해 사망에 이르게 함. 경찰은 사인을 단순 쇼크사로 설명했으나 언론 취재와 의료진의 소견 등이 고문 의혹을 드러냈음. 사건은 전국적인 추모와 고문 규탄운동을 촉발했으며, 이후 가해 경찰의 범위와 은폐 사실이 추가로 밝혀지면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저항을 증폭시킨 계기가 되었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서울대학교 6월 민주항쟁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1건

1987년 5월 1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함. 김승훈 신부가 낭독한 성명은 경찰이 발표한 고문 가담자가 2명이 아니라 5명이었으며,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과 유정방·박원택 등 대공수사 간부가 사건 축소·조작에 관여했다고 폭로함.

진실은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이부영에게 전달된 뒤, 안유 보안계장과 한재동 교도관, 재야 인사 김정남 등을 거쳐 사제단에 전해짐. 정권이 물고문 사실을 감추고 일부 경찰관만 희생양으로 내세워 사건을 종결하려 했다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확인된 것임.

폭로 직후 박종철 사건은 다시 전국적 쟁점으로 떠오름. 4·13 호헌조치 반대와 고문·은폐 규탄이 결합하면서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범국민적 저항이 확대됨.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1건

야당과 재야·종교계 등이 서울 향린교회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함. 국본은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 철회와 민주헌법 쟁취를 공동 목표로 삼고, 노태우의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일인 6월 10일에 전국적인 국민대회를 열기로 함. 각 분야와 지역의 민주화 요구를 공동행동으로 연결하여 6월항쟁의 조직적 구심점이 된 연합체였음.

6월 민주항쟁
조영대 1건

광주지방법원 민사14부가 전두환과 출판자인 전재국을 상대로 한 회고록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림. 5·18 관련 4개 단체에 각각 1,500만 원, 조비오 신부의 조카 조영대에게 1천만 원 등 총 7천만 원을 배상하도록 명령함.

회고록의 문제 표현을 삭제하지 않은 출판·배포도 금지함. 재판부는 역사에 관한 다른 견해를 밝히더라도 객관적인 자료에 기초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전두환의 서술이 원고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판단함.

그 외 사실들 14건

발언

  • 정직하고 근면한 사람이 존경받고 대우받는 사회를 이룩하고자 합니다.

    총칼로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 당시 국보위상임위원장이 1980년 8월 11일 인터뷰에서

    1980년 8월 11일 | 출처: www.khan.co.kr
  • 광주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광주 학살에 대해서 모른다, 나는.

    건강 문제로 재판 출석 회피 중 강원도 홍천의 한 골프장에서

    2019년 11월 7일
  • 젊은 사람들이 나한테 대해서는 아직 감정이 안 좋은가 봐.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아놓고.

    2008년 총선 투표 후 기자들과 간담회 중

    2008년 4월 9일 | 출처: www.youtube.com
  • 다만 이 불행한 사태의 경위가 어떻게 되었든 그 구체적인 책임 소재가 누구에게 귀속되건 간에 본인은 당시 정부와 군의 요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 책임의 일부를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광주 연속 특위 청문회가 길어지자 국회를 떠난 후 제출한 서면 중

    1989년 12월 31일
  • 지난번 광주의 시끄러운 일은 역사흐름의 불가피한 진통이므로 도민들이 80년대 새역사창조의 선도역할을 해주시면 나도 용기를 갖고 국민을 위해 충성을 다할것을 약속한다.

    대통령 취임 후 첫 지방 순시로 전남도청에서 각계 대표 47명과 오찬 중

    1980년 9월 5일 | 출처: newslibrary.naver.com

기록

트리비아

갱신 2026-10-08